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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영화

왼쪽으로 넘어간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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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책을 적어두는 목록이 있다. 그 안에 있던 한 권을 선물받았다. 『그랬다고 적었다』.

내가 걸어가던 방향으로 길이 한 칸 더 깔린 기분이었다. 그 마음까지 펼쳐보지는 않고 그냥 읽었다.

 

오랜만의 종이책이었다. 밤이 깊어지자 글자가 가라앉았다. 패드는 스스로 빛나는데 종이는 그러지 못한다. 등을 하나 더 켰다. 글자가 돌아왔다. 책이 빛을 달라고 했고, 나는 그 부탁이 싫지 않았다.

 

얇은 책이라 금세 읽혔다. 오른손에 쥔 두께가 한 장씩 왼손으로 옮겨갔다. 전자책은 이런 걸 알려주지 않는다. 지나온 만큼이 손바닥 아래에 쌓였다.

그런데 생각은 가지런히 넘어가지 않았다.

 

처음 걸린 건 '나'였다.

'진짜 나답게'라는 말이 사방에 붙은 시대에, 김애란작가는 나를 더 짙게 하자고 하지 않는다. 묽게 하자고 한다. 비워진 자리에 다른 사람과 다른 세계가 들어오도록.

 

처음엔 손에 잡히지 않았다. 별것 아닌 사람이 되라는 말인가. 나를 가볍게 여기라는 말인가.

 

다시 읽으니 지우라는 얘기가 아니었다. 내가 너무 진해서 남이 보이지 않는 순간을 알아보라는 얘기였다. 누군가의 말을 듣다가도 '그래서 나한테는 무슨 뜻이지'로 되돌아오는 버릇. 남의 사정을 내 경험으로 재빨리 번역해버리는 손놀림. 그럴 때의 나는 진하다.

 

그래도 '묽어진다'는 말은 끝내 삼키지 못했다.

남을 보는 일도 결국 내 창을 통과한다. 문제는 창이 있다는 데 있지 않다. 창의 얼룩을 모른다는 데 있다. 내 욕망과 상처와 편견을 모른 채 건네는 이해는 오히려 위험하다.

내가 가져온 건 묽어지기가 아니라, 지금 내가 얼마나 진한지 재보는 일이었다.

 

읽다 보면 글마다 체온이 달랐다. 당연했다. 수상 소감과 축사와 코로나 시절의 글이 한 권에 들어 있다. 사람을 보던 눈과 이야기를 보던 눈이 몇 해를 건너 같은 자리에 있을 리 없다.

 

AI 대목에서는 다른 데서 멈췄다.

책은 인간의 망설임을 본다. 바로 답하는 존재와 달리 사람은 머뭇거리고, 말하려다 접고, 끝내 하지 않는 말을 가진다.

 

나는 날마다 AI에게 말을 건다. 생각을 풀어놓고, 묻고, 사람에게는 바로 꺼내지 못할 말을 먼저 적어본다. 그러면서도 책에서는 '말할 수 있음'이 아니라 '말하지 않음'이 눈에 걸렸다.

 

사람에게 하는 고백에는 얼굴이 있다. 한 번 꺼낸 말은 두 사람 사이에 놓여 남고, 사이를 바꾼다. 그래서 삼킨다. 상대를 위해 삼킨 말과 내가 다칠까 봐 삼킨 말은 겉으로는 같은 침묵이다. 배려와 두려움, 신중함과 비겁함이 그 안에 함께 들어 있다. 안에서 무엇이 삼켜졌는지는 삼킨 사람만 안다.

 

아버지 대목에서 책과 나 사이가 접혔다.

올해 나는 아버지를 보냈다.

김애란작가의 아버지와 내 아버지는 다른 사람이다. 두 사람이 나눈 시간도 내 시간과 겹치지 않는다. 그런데 몸이 문장에 들어서자 몇 줄이 남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마음은 아직 뭔가를 바라는데 몸이 응하지 않는다. 한 사람을 세워두던 몸이 어느 날부터 그 사람을 가둔다. 병은 곁의 사람을 슬프게만 하지 않는다. 지치게 하고, 불편하게 하고, 도망치고 싶게도 만든다.

 

그 대목에서 슬픔은 혼자 오지 않았다. 부끄러움이 같이 왔고, 불편함이 같이 왔고, 고마움이 왔다. 고마움 옆에는 갚지 못한 것 같은 마음이 서 있었다.

고마움에는 받은 상대가 있고, 빚에는 아직 못 갚은 내가 남는다. 떠난 사람에게 무엇을 더 건넬 수 있을까.

 

책에서 이런 문장을 만났다.

"어쩌면 너의 과거에 빚진 내가
네가 마련해준 현재에 앉아
이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문장을 읽고도 '너'가 내게 누구인지는 정하지 않았다.

 

'받아줌을 받는다'는 표현에서 오래 멈췄다.

'받다'가 두 번 들어간 문장이다. 매끈하게 고치자면 고칠 수 있다. 고치지 않아서 남았다.

한 사람은 받아주고, 다른 한 사람은 그 받아줌을 받는다. 두 동작 사이에는 설명할 수 없는 시간이 끼어 있다.

 

기다려준 일. 재촉하지 않은 일. 묻지 않고 지나간 일. 설익은 나를 더 두고 본 일.

생각해보면 나도 그걸 받아온 사람이다.

읽는 동안 자꾸 내가 글을 적을 때의 버릇이 보였다.

 

나는 결론이 빠르다. 장면을 하나 보면 의미부터 찾고, 찾은 의미는 독자에게 설명한다. 친절이라고 생각했는데, 독자가 들어올 자리를 내 설명으로 먼저 채워놓은 것이기도 했다.

 

이 책에서 가져가고 싶은 건 문체가 아니다. 결론을 늦추는 힘이다. 알 것 같은 순간에 한 번 더 들여다보는 것. 이해했다고 느낄 때, 내가 본 게 그 사람의 몇 할인지 따져보는 것. 불편한 마음을 서둘러 좋은 뜻으로 바꾸지 않는 것.

 

마지막 장을 넘겼다.

오른손에는 뒤표지만 남았고, 읽은 종이는 전부 왼쪽에 쌓였다. 손으로 만지면 분명 다 넘어와 있었다.

 

불을 하나 더 켜둔 방에서 책을 덮었다.

조금 전까지 읽던 몇 문장은 아직 어느 쪽에도 놓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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