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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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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갈 수 있을 만큼만 사람들은 종종 전문가를 찾아간다. 상담을 받고, 강연을 듣고, 책을 읽는다. 평소에는 남의 말을 대충 흘려듣던 사람도 그런 자리에서는 조용해진다. 고개를 끄덕이고 메모를 한다. 마음에 걸린 문장은 핸드폰에 남긴다. 강연이 끝날 무렵이면 얼굴도 조금 달라진다. 오래 막혀 있던 곳이 하나쯤 뚫린 듯한 얼굴이다. 며칠 뒤 다시 만나보면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같은 사람과 같은 이유로 다투고, 같은 방식으로 일을 미루고, 비슷한 말을 반복한다. 그렇다고 그날의 감동이 거짓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순간 움직인 마음이 삶으로 곧바로 따라가는 것이 아닐 뿐. 사람은 마음이 움직였다고 해서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을 곧장 바꾸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지금의 삶을 계속 살아낼 수 있도록 마음의 자리를 조금씩 옮긴다. 상담이..
그런 아침 삼일째 비가 온다. 잠들기 전에도 들었고, 새벽에 눈을 떴을 때도 들었다. 밤을 건너온 소리다. 오래 기다린 비라 창밖을 보지 않아도 좋다. 이틀 동안 나를 붙잡고 흔들던 두통이 조금 물러났다.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고, 어제까지 머리 한쪽을 제 것처럼 차지하고 있던 것이 조금 뒤로 갔다. 비가 오고, 머리는 덜 아프고, 어딘가 논은 젖고 있을 것이다. 비를 기다린 건 나였는데 막상 비가 오니 먼저 떠오르는 건 땅이다. 별 관계도 없는 것들이 한꺼번에 괜찮아진 아침이다. 이상하게 조건이 갖춰졌다는 생각이 든다. 무슨 조건인지는 모르겠다.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를 떠나기로 한 것도 아니고, 오래 미뤄둔 일을 시작해야 하는 날도 아니다. 드래곤볼이라도 모으듯 필요한 것들이 하나씩 다 모인 느낌이다...
판본 참 몹쓸 음악이다. 밤 열두 시가 다 되어 간다. 하루가 끝나고 내일이 시작되기 직전, 겨우 일에서 풀려나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스피커에서 노래 하나가 흘러나온다. 들었는지 봤는지도 모르게 어느새 흥얼거리던 멜로디인데, 언제 어디서 주웠는지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그런데 입은 알고 있다. 마음이 먼저 안다. 솔직히 이런 음악이 가끔은 얄밉다. 음악을 좋아하고, 노래를 좋아하고, 그 감성에 홀딱 빠지는 것도 좋아하는 주제에, 이걸로 먹고사는 것들이 야속하달까. 그동안 나는 꽤 많이 달라졌는데 노래는 그 사정을 봐줄 생각이 없으니 말이다. 환경도 바뀌고, 상황도 바뀌고, 마음먹은 것까지 다 바뀌었는데, 몇 소절이면 나를 그 자리로 되돌려 놓는다. 그때의 나로, 그때의 표정으로. 돌아가고 싶은 건 ..
여름을 함께 보내는 법 사랑스러운 예삐가 왔다. 좋은 일로 온 것은 아니다. 지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예삐는 그분이 이뻐하던 강아지다. 장례를 치르는 며칠 동안 예삐는 우리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누군가는 마지막 인사를 준비하고, 예삐는 이유도 모른 채 잠시 다른 집으로 왔다. 첫날 밤, 예삐는 어떻게든 내 몸 한 군데를 붙이고 자려 했다. 발끝에 닿아 있다가 다리 쪽으로 올라오고, 밀어 놓으면 또 슬금슬금 다가왔다. 아침에 눈을 뜨니 예삐는 침대 한가운데 세상 편하게 자고 있었고, 나는 알파벳 S처럼 구부러져 있었다. 나는 남의 집 개 이름을 잘 바꾼다. 며칠만 같이 있으면 어느새 내가 부르는 다른 이름이 생긴다. 이번에는 그러지 못했다. 예삐는 귀가 들리지 않는다. 이름을 불러도 모른다. 손을 흔들고, 엄지를 세우고, ..
했음, 안 했음 사흘 동안 노트북을 열지 않았다. 금요일에도, 토요일에도 열지 않았다. 일요일이 지나도록 노트북은 책상 위에 접힌 채였다. 핸드폰 속 체크리스트의 날짜도 며칠 전에서 멈춰 있었다. 대단한 일은 아니다. 누군가는 한 달을 그렇게 보내고도 잘 산다. 다만 나는 노트북을 열어야 하루가 시작되는 쪽이다. 전원을 켜는 일은 일을 시작한다는 뜻이면서, 세상에 접속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몇 달 동안 정신없이 움직였다. 사람을 만나고, 전화를 받고, 쓰고, 정리했다. 큰일 하나를 끝내면 작은 일들이 줄을 섰다. 하나를 마치면 다음 일이 이미 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첫날은 쉬었다고 생각했다. 둘째 날에는 오늘까지 해야 할 일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없지는 않았다. 다만 하지 않아도 될 이유가 더 빨리 떠올랐다. 셋째 날..
말이 증거가 되는 관계 언어의 민감함은 장마 전의 날씨를 닮았다. 아직 아무것도 내리지 않았는데 몸이 먼저 안다. 공기가 무거워지고, 셔츠가 등에 붙고, 사람들은 저마다 하늘을 한 번씩 올려다본다. 어떤 관계에서 나는 그 날씨를 먼저 감지하는 사람이었다. 농담 하나, 늦은 답장 하나, 말끝에 붙은 조사 하나에서 습기를 읽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미 불쾌한, 그런 계절이 관계 안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 처음의 길은 곧았다. 넓지 않아도 충분했고 빠르지 않아도 닿았다. 그 길이 어느 해부터 포장을 잃었다. 자갈이 생기고, 굽이가 생기고, 나중에는 산길이 되었다. 길이 험해진 것인지 내 걸음이 조심스러워진 것인지 지금도 정확히는 모른다. 다만 그때부터 나는 말을 오래 만지기 시작했다. 이 말은 건너도 되는가. 이 침묵은..
그렇게 깎아서 나아지는 것은 없다 대표팀이 돌아오던 날, 공항에는 사람을 맞으러 나온 이보다 사람을 밀어내려는 말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졌으니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하다. 감독은 약자가 아니다. 연봉도 권한도 그에게 있었다. 가진 만큼 책임도 그의 몫이다. 다만 한 경기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한 대회 전체를 지나며 드러난 준비, 판단, 반복된 실패를 묻자는 것이다. 그런데 화면을 떠도는 말들은 자꾸 다른 쪽으로 갔다. 나가라. 다시는 오지 마라. 출입 금지. 솔직히 첫 짤에는 나도 웃었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같은 얼굴이 같은 방식으로 계속 깎이고 있었다. 비판이라면 한 번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멈추지 않자, 비판처럼 보이던 것이 다른 무엇으로 바뀌어 있었다. 웃지 못하면서도 화면을 끄지 못한 그 시간이, 처음의 웃음보다 더 마음..
일이 앞으로 가는 방식 아침에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대단하지 않다. 해야 할 것들을 적는다. 어제 넘어온 것, 오늘 끝내야 할 것, 아직 결정을 기다리는 것, 누군가에게 확인해야 할 것. 적는 순간, 머릿속에서 떠다니던 일이 바깥으로 나온다. 눈앞에 놓이면 일의 표정이 달라진다. 급해 보였던 것이 사실은 기다려도 되는 것일 때가 있고, 조용히 밀려 있던 한 줄이 하루 전체를 붙잡고 있을 때도 있다. 바쁜 일만 보다 보면 빠진 일을 놓친다. 메모는 기억을 돕는 도구라기보다, 생각을 현실로 끌어내리는 장치에 가깝다. 좋은 아이디어 하나가 곧바로 결과가 되는 경우는 드물다. 방향이 있어도 모양이 없으면 흩어지고, 모양이 있어도 사람이 움직이지 않으면 문서로 남는다. 생각을 문장으로, 문장을 자료로, 자료를 일정으로, 일정을 사람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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