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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

출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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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새벽부터 내리고 있었다.

젖은 도로 위로 가장 먼저 지나간 건 출근 버스보다 유세차였다. 아직 상가 셔터도 다 올라가기 전인데 스피커에서는 이미 선거송이 흘러나왔다. 교차로를 돌 때마다 기호 다른 번호의 차량들이 하나둘 모여들었고, 비옷 입은 사람들이 음악 박자에 맞춰 팔을 흔들었다. 하나같이 귀에 남는 멜로디였다. 한 번 들으면 하루 종일 머릿속 어딘가를 맴돌 것 같은, 이른바 수능금지곡 같은 리듬. 비 오는 아침인데도 사람 몸을 먼저 움직이게 만드는 종류의 소리였다. 나도 모르게 손이 올라갔다가, 잠깐 웃음이 났다.

 

오늘부터 공식선거운동이 시작됐다.

 

사람들은 흔히 이 날을 시작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캠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오늘은 시작이라기보다 준비가 끝나는 날에 가깝다. 지금까지는 설계하고 정리하고 맞춰보는 시간이었다면, 오늘 이후부터는 몸으로 밀고 들어가는 시간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상황이 바뀌고, 변수는 예고 없이 들어온다. 이제 남은 건 날아오는 말을 막고, 예상하지 못한 흐름을 버티며 앞으로 가는 일에 더 가깝다.

 

13.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인데, 선거 안으로 들어오면 시간의 결이 달라진다. 오전에 세운 계획이 저녁이면 의미 없어지고, 하루가 아니라 몇 시간 단위로 공기가 바뀐다. 그래서 출정식이라는 장면은 묘하다. 사람들은 웃고 손을 흔들지만, 그 안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시간을 준비해온 사람들 특유의 긴장이 섞여 있다.

 

비를 맞으며 서 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처음 선거운동 점퍼를 입어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여러 번 이런 아침을 지나온 사람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다시 어디엔가 속해 있다는 감각 때문에 나왔을 것이고, 누군가는 자기 시간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후보는 후보대로, 운동원은 운동원대로, 캠프 관계자는 또 각자의 이유로 그 비를 맞고 있었다. 같은 노래를 듣고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지만, 사람마다 마음속에서 지나가는 장면은 전부 달라 보였다.

 

신호를 기다리던 시민들은 잠깐씩 유세차 쪽을 바라봤다.

버스 창문 너머로 선거송이 스쳤고, 편의점 자동문이 열릴 때마다 음악 일부가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가 다시 끊겼다. 누군가는 이제 또 시작이네 생각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아침부터 시끄럽다고 중얼거렸을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무심하게 지나갔고, 어떤 사람은 비를 맞으며 잠깐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선거철이 되면 도시는 아주 잠깐 평소와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출근하던 사람들이 횡단보도 앞에서 유세차 지나가길 잠깐 기다리고, 늘 조용하던 사거리에 음악이 오래 남고, 평소라면 서로 말을 섞지 않았을 사람들이 같은 번호를 이야기한다. 편의점 계산대 앞에서도, 택시 안 라디오에서도, 점심시간 식당 TV 아래에서도 선거 이야기가 스쳐 지나간다. 누군가는 관심 없는 척하지만, 또 누군가는 무심한 얼굴로 여론조사 숫자를 기억한다.

 

도시는 원래 각자의 생활로 흩어져 움직이는 곳인데, 선거철만 되면 잠깐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 되는 순간들이 생긴다.

 

물론 그 마음의 깊이는 다 다르다. 누군가는 꼭 바뀌었으면 하고, 누군가는 이번에도 별수 없을 거라 생각하고, 누군가는 그냥 지나가는 계절처럼 받아들인다. 그래도 사람들은 신호등 앞에서 잠깐 유세차를 바라보고, 지나가는 노래 한 소절을 듣고, 후보 이름 하나쯤은 기억하게 된다. 마치 도시 전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같은 시간을 함께 통과하고 있다는 느낌처럼.

 

공업탑에는 어느새 여러 정당 유세차가 한꺼번에 모여 있었다. 서로 다른 번호와 노래가 비 오는 도로 위에서 뒤섞였다. 도시는 평소처럼 출근하고 있었고, 선거는 그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비는 계속 내렸고,
유세차 안 사람들의 팔은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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