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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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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것이 무너지는 순간 오늘 아침, 한 남자가 전쟁의 경과를 보고했다. 핵심 전략 목표가 거의 완수되었다고 했다. 해군은 소멸되었고, 미사일 생산 능력은 파괴되었으며, 곧 끝날 것이라고 했다. 그 직전에 그는 휴전을 거부했다. 상대를 완전히 소멸시키고 있는 중에 휴전은 하지 않는다, 는 것이 이유였다. 그 문장은 논리적으로 완결되어 있었다.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전쟁은 항상 설명과 함께 온다. 역사적 맥락, 안보 논리, 동맹 구조, 에너지 이권. 설명이 정교할수록 죽음은 점점 더 납득 가능한 것처럼 다루어진다. 그 납득의 과정이, 사실은 가장 위험한 일이다. 작전명이 붙고, 목표가 번호를 달고, 진척률이 백분율로 환산되는 순간, 전쟁은 프로젝트가 된다. 프로젝트에는 비극이 없다. 지연과 초과 비용만 있을 뿐이다. 나는 전쟁을..
몽글몽글, 그냥 사람 얘기 남의 연애 이야기를 듣는 건 언제나 흥미롭다. 그 옛날 사랑의 스튜디오부터 돌싱, 이제는 부모님까지 함께 나오는 합숙 연애 프로그램까지 있을 정도다. 허용된 관음과 뒷담화는 은근한 우울감과 결속을 강화해 도파민을 배출시킨다.그래서 이효리의 몽글상담소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땐 다소 실망감을 금치 못했다. 마치 빈곤 포르노처럼 약자에게서 어떤 도파민을 탈취하려고 하는지.내가 틀렸다. 몽글상담소는 다르다.이건 도파민이 아니라 온도다. 따뜻한 데 오래 앉아있으면 일어나기 싫은 것처럼, 자극이 아니라 온기가 우리를 붙잡는다.그 온기가 어디서 오는지 처음엔 몰랐다. 발달장애인이 화면에 등장한 적이 없었던 건 아니다.〈말아톤〉이 있었고, 〈굿닥터〉가 있었다. 근데 그 자리엔 늘 보호자가 옆에 있었거나, 천재적인 능력이..
우리는 자라지만, 달라지지는 않는다 국민학교와 중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참 다양한 친구들이 있었다. 착한 아이, 약삭빠른 아이, 괜히 큰소리만 치던 아이, 뒤에 숨어 책임을 피하던 아이, 앞과 뒤가 달랐던 아이. 그때는 그저 철없는 시절의 모습이라 여겼다.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되면 다들 비슷해질 거라고, 자연스럽게 성숙해질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살아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서 묘한 기시감이 반복된다. 모두가 사회적 역할과 이해관계를 지닌 어른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조금만 시간을 두고 보면 어린 시절 교실에서 보았던 그 모습들이 형태만 바뀐 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앞에 나서던 아이는 여전히 중심에 서는 자리를 찾고, 눈치를 보던 아이는 여전히 상황을 재며 움직..
투표장을 향하는 얼굴 투표를 안 하는 사람에게 왜 안 가냐고 물으면 대답은 대개 같다.어차피 다 똑같아. 이 말은 귀찮다는 뜻이 아니다.여러 번 기대했다가, 여러 번 실망했고, 그래서 더 기대하지 않기로 마음을 정리한 뒤에 나오는 말이다.무관심이 아니라 정리다. 마음을 접은 상태. 그래서 어떤 사람은 아예 가지 않는다.가봤자 달라지는 게 없다는 느낌이 이미 몸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한 번도 안 가본 사람이 아니라, 가본 사람에게서 더 자주 나오는 태도다. 반대로 투표장까지 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놀라울 만큼 비슷하다.대단한 결심을 한 표정이 아니다.장 보러 나온 사람처럼, 그날 해야 할 일을 하러 온 얼굴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는 전혀 다른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 누군가는 마음이 걸려서 간다.좋아서가 아니라, 그냥 놔두면 내가..
태블릿 앞에 선 사장님 배달앱이 없던 시절, 동네 식당 계산대 옆에는 그냥 전화기가 놓여 있었다.그 전화는 주문을 받고, 배달을 부르고, 가끔은 단골과 수다를 나누는 창구였다.삐걱거리는 수화기 너머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었다. 사장님은 새벽에 시장에 나가 재료를 사고, 낮에는 불 앞에 서 있었고, 밤에는 정산을 했다.고단했지만 분명한 것이 있었다. 그 장사는 자기 손 안에 있었다.손님도, 배달도, 계산도, 책임도 모두 자신의 몫이었다. 지금 계산대에는 전화기 대신 태블릿이 놓여 있다.알림음이 끊임없이 울린다. 주문은 많아졌다.그러나 사장님의 표정은 예전보다 가볍지 않다. 매출은 늘었는데 손에 남는 돈은 비슷하거나 줄었다고 한다.재료비와 인건비는 그대로인데, 매출의 상당 부분이 자동으로 가게 밖으로 빠져나간다.중개수수료, 결제수수..
나의 메모리 카드 집중하다 보면 문득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리는 때가 있다. 생각이 안 나는 게 아니라, 더 이상 집어넣을 자리가 없어서 생기는 과부하에 가깝다. 아이디어는 문밖에서 서성거리는데, 머릿속엔 '메모리 부족'이라는 무심한 경고등만 반복해서 뜨는 요즘이다. 이 감각의 시작은 의외로 아주 조용했다.나란히 앉아 시간을 보내다 우연히 마주친 사진 몇 장. 이미 지워진 줄 알았던 그 장면들을 곁에 있는 이가 조용히 꺼내 보여주었다. 오래전 함께 보냈던 시간들. 그때는 모든 게 새로워서 더 날카롭게 설렜던 순간들이다. 사진은 낡았는데 그걸 바라보는 마음은 이상할 만큼 생생했다. 요즘처럼 설렐 일이 드문 시기라 그런지, 그 찰나의 장면이 생각보다 깊은 자국을 남겼다. 그 설렘이 나를 과거 쪽으로 슬쩍 밀어냈다.아주 오랜만..
긍정의 기원 나는 본래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작은 일에도 마음이 먼저 반응했고, 상황보다 감정이 앞섰다. 문제가 생기면 해결보다 상상이 먼저였고, 그 상상은 대개 최악의 방향으로 흘렀다. 그래서 세상은 늘 조금 과장되어 느껴졌다. 별일 아닌 것도 크게 다가왔고, 사소한 균열이 금방 전체를 흔들었다. 사람들은 그걸 예민하다고 불렀지만, 나는 그냥 그렇게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떠다니는 쪽의 인간. 엠블란스 소리를 처음 의식하게 된 것도 그 무렵이다. 새벽을 가르는 사이렌은 필요 이상으로 마음을 건드렸다. 잠을 깨우는 소리이면서 동시에, 어딘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신호 같았다. 괜히 창밖을 보게 만들고, 알 필요 없는 상상을 불러왔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 소리를 두고 “사람 살리는 소리”라고..
개늑시, 인간의 얼굴 오랜만에 여유로운 출근길. 느긋한 아침 식사를 하며 본 '개늑시'.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는 말은 원래 해 질 녘의 애매한 순간을 가리킨다. 빛과 어둠이 겹치고, 익숙한 것이 낯설어지는 시간. 나는 그 프로그램을 보며 그 말이 개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는 걸 자주 느낀다. 오히려 이 시간이 인간의 부족함을 더 잘 드러내는 것 같다. 프로그램 속 사연들 중 많은 경우는 비극이라기보다 방치에 가깝다. 조금만 관찰했으면, 조금만 공부했으면, 조금만 시간을 썼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이야기들. 사람들은 개를 문제라고 말하지만, 화면을 보면서 나는 자꾸 다른 것이 보인다. 환경을 설계하지 않은 인간, 자기 감정을 관리하지 못한 인간, 선택의 무게를 가볍게 여긴 인간. 개는 거의 문제가 없다. 그들은 개 종의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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