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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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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지 않는 사람들 생방송으로 진행된 업무보고를 보면서 묘한 감정이 들었다. 정치적 입장의 문제가 아니었다. 일의 태도에 대한 감정이었다. 화면 안에서 질문이 질문답게 오갔다. 답변이 미리 준비된 문장처럼 매끄럽지 않았다. 생각의 흔적이 말 사이로 튀어나왔고, 숫자를 찾느라 잠깐 멈칫하기도 했다. 이해되지 않는 대목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이 부분은 어떻게 된 겁니까?" 물음이 계속 이어졌고, 답하는 쪽도 모르는 건 모른다고 말했다. 그 솔직함이 화면을 통해 그대로 전달되는 순간, 오랜만에 '일하는 현장'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보고를 받는 쪽도, 하는 쪽도 서로를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수 없었다. 생방송이라는 형식은 사실 쌍방에게 불리하다. 질문하는 쪽도 실수할 수 있고, 답하는 쪽도 준비 안 된 모습이..
의사결정은 합리적인가 카페에서 메뉴를 고를 때가 있다. 아메리카노, 라떼, 에스프레소. 논리적으로 따지자면 가격, 칼로리, 카페인 함량을 비교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지난번 마셨던 것, 지금 기분, 눈에 먼저 들어온 것으로 정한다. 그런데 실제 삶에서 사람들이 결정하는 방식을 보면, 제한된 합리성이라는 말조차 다소 친절하게 느껴진다. 친구는 6개월 동안 강아지를 키울지 고민했다. 노트에 장단점을 적었다. 키우고 싶은 이유는 열여덟 가지, 망설여지는 이유는 스물세 가지였다. 만날 때마다 같은 말을 했다. "키우고 싶은데, 시간이 없어." 그러다 주말에 보호소를 찾았다. 한 마리가 다가와 손을 핥고 눈을 마주쳤다. 3초였다. 6개월의 고민이 그 순간 정리되었다. 고민한다는 것과 결정을 미룬다는 것은 다르다. 친구의 노트에 적..
말 않던 시간 먼저 연락하는 쪽은 대체로 정해져 있다. 답장이 늦어도 괜찮은 사람이 있고, 늦으면 마음이 먼저 무거워지는 사람이 있다. 같은 관계 안에 있어도 누군가는 더 자주 생각하고, 누군가는 더 늦게 반응한다. 관계는 처음부터 같은 무게로 놓이지 않는다. 이 불균형은 낯설지 않다. 대부분의 관계는 약간 기운 채로 시작한다. 공평한 출발은 오히려 예외에 가깝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의 기울어짐을 문제 삼지 않는다. 성향의 차이라고 넘기고, 시간이 지나면 익숙함이라는 말로 덮는다. 문제는 각도가 고정될 때 시작된다. 관계가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순간은 기울어짐이 생겼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각도가 시간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을 때다. 역할이 굳어진 관계는 사람의 중심을 조금씩 흔든다. 항상 먼저 연락하는 사람, 늘 이해..
겹쳐 흐르는 시간 한 그루에봄 여름 가을 겨울이 다 들었다.멀리서 내려다보며 다가서니연두, 초록, 노랑, 빨강이그라데이션처럼 번져간다. 가지 끝 붉은 것은 십일월의마지막 고집을 품고,중심부 노란 것은 시월의체념을 받아들였다.그 사이의 초록은칠월의 기억을 더듬고,맨 꼭대기 연두는사월의 떨림을 아직 간직했다. 언제부턴가 하나의 계절 안에온전히 머물 수 없게 되었다.봄이 끝나기 전에 여름이 오고,가을이 오기 전에 겨울이 왔다. 이 나무는혼란스러운 것이 아니라정직한 것인지도 모른다. 몸 안에 모든 시간을 품고어느 것도 숨기지 않는 존재. 은행잎 노란 카펫 위를 걷는데목덜미는 차갑고햇살은 따스하다.이것이 십일월이라는부정확한 이름. 우리는 이제계절을 묻지 않는다.
문틈의 기척 머릿속에는 문이 많다.서로에게 기대어 미세하게 뒤틀린 문들.어디에도 완전히 닿지 못한 상태로바람이 스치면 제각기 다른 떨림을 흘린다. 문 하나에 손끝이 닿으면가장 먼 문이 먼저 숨을 고르고,열리지도 닫히지도 않은 기척이내 안쪽으로 번져온다.생각은 나에게서 시작되는 듯하다가도틈의 어둠이 먼저 나를 읽어낼 때가 있다. 반쯤 열린 사이로빛과 어둠이 서로의 가장자리를 잡아당기며 흐른다.그 흐름이 어디로 닿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오히려 나를 잠시 평온하게 비워놓는다. 나는 그 경계를 넘지 않는다.넘고 싶은 욕망이 없어서가 아니라,아직 방향을 다 말하고 싶지 않아서.문틈에서 흘러나오는 숨을 듣는 동안내 쪽에서도 아주 미세한 떨림이그 틈에 닿는다. 가끔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다.문 앞에 서지 않는 사람들.복도를 걷..
인적 쇄신 이건 감정의 언어가 아니라 권력의 언어다.사람을 자르는 얘기가 아니라 사람을 다시 세우는 일이다.진짜 쇄신은 교체가 아니라 회복이니까.그러나 사람을 바꾸는 일보다 마음을 바꾸는 일이 더 어렵다. 인적 쇄신은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적용해야 하는 매우 어려운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적쇄신이라는 말은 늘 타인을 겨냥한다. 그러나 진짜 쇄신은 오래된 나를 내보내는 일에서 시작된다. 선택적 저항이라는 말이 있다. 좋은 정책에는 협조하고 나쁜 정책에는 비협조한다는 뜻이다.그러나 이정도면 다행이다. 지금 일어나는 선택적 저항은 그렇지 않다. 나의 영리와 라인, 나의 조직 안위를 위해 존재한다. 그 조직이 국민을 위해 일하는 조직이라도 그렇다. 어느 부서의 과장이 있다. 그는 정책의 옳고 그름..
오르골 그림자 낮엔 무지갯빛이었다.햇살이 바뀌자, 관람차 오르골은 벽 위에 다른 얼굴을 남겼다.한때는 음악이 돌고, 빛이 흩어졌다.지금은 멈췄다.소리도, 회전도 없다.남은 건 오직 그림자 하나.나는 그 그림자를 오래 바라본다.빛은 빠르고 변덕스럽다.아침이면 길게 늘어지고, 한낮엔 쪼그라들고, 저녁엔 사라진다.그림자는 그런 변화를 담담하게 받아들인다.빛이 가는 대로 모양을 바꾸되,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킨다.말도 없고 얼굴도 없지만, 모든 것을 그대로 베껴 산다.묘하게 충성스럽다.감정이 흐려질 땐 관찰이 유일한 구명줄이다.뭔가를 자세히 본다는 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신호다.색이 사라지니 형태가 드러난다.그림자는 빛보다 솔직하다.
적절한 낱말 가수 성시경이 일본 음식을 소개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면을 입에 넣고 한참을 씹더니 그가 말했다. "치아가 면을 끊는 순간의 저항감." 그냥 "쫄깃하다"고 해도 되는데, 그는 자신이 느낀 것을 정확하게 포착하려 애썼다.더 인상적이었던 건 그 다음이었다. 그는 요리사가 아님에도 음식의 역사, 육수를 내는 방식, 지역마다 다른 면의 두께까지 일본 음식을 모르는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찬찬히 설명했다.그 장면을 보며 생각했다. 이런 게 진짜 소통이구나. 자신이 경험한 것을 상대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옮겨내는 일. 나는 여러 유형의 사람들을 만나며 소통한다.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인다는 전제 아래에서도, 같은 주제를 놓고 나누는 대화의 밀도는 천차만별이다. 어떤 대화는 물 위를 스치듯 겉만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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