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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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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종위기사랑 인간은 원래 떠돌던 종이었다. 계절을 따라, 먹이를 따라. 오래 머무르면 죽었다.그 인간을 멈춰 세운 건 불이었다.불이 생긴 뒤, 인간은 밤에도 한 장소에 남았다. 어두워지면 돌아왔고, 작은 불 주변으로 모여 앉았다. 거기서 기다림이 생겼다.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을 걱정하는 마음, 돌아온 얼굴을 보고 안도하는 감각.누군가를 기다리기 위해 돌아오고, 같은 얼굴을 반복해서 보기 위해 한 장소에 머무는 것. 어쩌면 사랑은 그때 시작된 본능이지 않을까. 멸종위기사랑을 들으며 이상하게 그 장면이 보였다. 노래는 사랑을 이야기하는데 자꾸 인간의 오래된 밤이 떠올랐다.가사에 이런 말이 나온다. 한 사람당 하나의 사랑이 있었다고.그 순간 사랑이 감정이 아니라 자원처럼 느껴졌다. 누구에게나 단 하나만 주어진 불씨. 잘못..
출정식 비는 새벽부터 내리고 있었다.젖은 도로 위로 가장 먼저 지나간 건 출근 버스보다 유세차였다. 아직 상가 셔터도 다 올라가기 전인데 스피커에서는 이미 선거송이 흘러나왔다. 교차로를 돌 때마다 기호 다른 번호의 차량들이 하나둘 모여들었고, 비옷 입은 사람들이 음악 박자에 맞춰 팔을 흔들었다. 하나같이 귀에 남는 멜로디였다. 한 번 들으면 하루 종일 머릿속 어딘가를 맴돌 것 같은, 이른바 수능금지곡 같은 리듬. 비 오는 아침인데도 사람 몸을 먼저 움직이게 만드는 종류의 소리였다. 나도 모르게 손이 올라갔다가, 잠깐 웃음이 났다. 오늘부터 공식선거운동이 시작됐다. 사람들은 흔히 이 날을 시작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캠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오늘은 시작이라기보다 준비가 끝나는 날에 가깝다. 지금까지는 설계하고 정..
아버지 임종실에는 창도 티비도 시간도 없었다. 대신 숫자가 있었다. 심박수, 산소포화도, MAP, RR. 모니터는 쉬지 않고 사람의 상태를 숫자로 번역했다. 삐, 삐, 삐. 1분에 한 번씩 울리는 경고음은 병실의 공기가 아니라 신경을 흔들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눈을 감아도 들렸다. 사람은 소리에 이렇게 갇힐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계속 모니터를 봤다. 아버지를 한번 보고, 숫자를 한번 보고, 다시 아버지를 봤다. 기계는 계속 숫자를 말하는데, 그 아래에는 사람이 있었다. 아버지는 젊을 때 SK 섬유공장 관리직이었다. 그 시절 공장 기계는 대부분 일본제였고, 출장도 조립도 아버지가 맡았다고 했다. 일본에서 부품이 오면 혼자 분해하고 다시 조립했다. 머리가 좋고 손재주가 좋았다. 내 유치원 행사 무대 글씨도..
. 4.16이다. 또, 라는 말이 먼저 나온다. 나도 그렇다. 세상은 그새 여러 번 무너지고 쌓였고, 사람들은 바쁘게 슬퍼하고 바쁘게 잊었다. 나도 한 번 그 말 속으로 들어가 봤으니까. 그런데 못 넘어간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설명할 수 있으면 진작 넘어갔을 것이다. 화면이 있었다. 반복해서 재생되는 장면들. 나는 그것들을 편집했다. 지하 사무실에서, 혼자, 보고 또 보면서. 영상은 잘려야 했고 나는 계속 잘랐다. 어디서 끊어야 하는지 몰랐다. 편집이란 원래 끝이 없다. 그냥 어느 날 그만두는 게 끝이다. 기억도 그런 것 같다. 오늘도 누군가는 그 이름 앞에서 멈출 것이다. 멈추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 채로.
당연한 것이 무너지는 순간 오늘 아침, 한 남자가 전쟁의 경과를 보고했다. 핵심 전략 목표가 거의 완수되었다고 했다. 해군은 소멸되었고, 미사일 생산 능력은 파괴되었으며, 곧 끝날 것이라고 했다. 그 직전에 그는 휴전을 거부했다. 상대를 완전히 소멸시키고 있는 중에 휴전은 하지 않는다, 는 것이 이유였다. 그 문장은 논리적으로 완결되어 있었다.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전쟁은 항상 설명과 함께 온다. 역사적 맥락, 안보 논리, 동맹 구조, 에너지 이권. 설명이 정교할수록 죽음은 점점 더 납득 가능한 것처럼 다루어진다. 그 납득의 과정이, 사실은 가장 위험한 일이다. 작전명이 붙고, 목표가 번호를 달고, 진척률이 백분율로 환산되는 순간, 전쟁은 프로젝트가 된다. 프로젝트에는 비극이 없다. 지연과 초과 비용만 있을 뿐이다. 나는 전쟁을..
몽글몽글, 그냥 사람 얘기 남의 연애 이야기를 듣는 건 언제나 흥미롭다. 그 옛날 사랑의 스튜디오부터 돌싱, 이제는 부모님까지 함께 나오는 합숙 연애 프로그램까지 있을 정도다. 허용된 관음과 뒷담화는 은근한 우울감과 결속을 강화해 도파민을 배출시킨다.그래서 이효리의 몽글상담소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땐 다소 실망감을 금치 못했다. 마치 빈곤 포르노처럼 약자에게서 어떤 도파민을 탈취하려고 하는지.내가 틀렸다. 몽글상담소는 다르다.이건 도파민이 아니라 온도다. 따뜻한 데 오래 앉아있으면 일어나기 싫은 것처럼, 자극이 아니라 온기가 우리를 붙잡는다.그 온기가 어디서 오는지 처음엔 몰랐다. 발달장애인이 화면에 등장한 적이 없었던 건 아니다.〈말아톤〉이 있었고, 〈굿닥터〉가 있었다. 근데 그 자리엔 늘 보호자가 옆에 있었거나, 천재적인 능력이..
우리는 자라지만, 달라지지는 않는다 국민학교와 중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참 다양한 친구들이 있었다. 착한 아이, 약삭빠른 아이, 괜히 큰소리만 치던 아이, 뒤에 숨어 책임을 피하던 아이, 앞과 뒤가 달랐던 아이. 그때는 그저 철없는 시절의 모습이라 여겼다.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되면 다들 비슷해질 거라고, 자연스럽게 성숙해질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살아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서 묘한 기시감이 반복된다. 모두가 사회적 역할과 이해관계를 지닌 어른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조금만 시간을 두고 보면 어린 시절 교실에서 보았던 그 모습들이 형태만 바뀐 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앞에 나서던 아이는 여전히 중심에 서는 자리를 찾고, 눈치를 보던 아이는 여전히 상황을 재며 움직..
투표장을 향하는 얼굴 투표를 안 하는 사람에게 왜 안 가냐고 물으면 대답은 대개 같다.어차피 다 똑같아. 이 말은 귀찮다는 뜻이 아니다.여러 번 기대했다가, 여러 번 실망했고, 그래서 더 기대하지 않기로 마음을 정리한 뒤에 나오는 말이다.무관심이 아니라 정리다. 마음을 접은 상태. 그래서 어떤 사람은 아예 가지 않는다.가봤자 달라지는 게 없다는 느낌이 이미 몸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한 번도 안 가본 사람이 아니라, 가본 사람에게서 더 자주 나오는 태도다. 반대로 투표장까지 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놀라울 만큼 비슷하다.대단한 결심을 한 표정이 아니다.장 보러 나온 사람처럼, 그날 해야 할 일을 하러 온 얼굴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는 전혀 다른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 누군가는 마음이 걸려서 간다.좋아서가 아니라, 그냥 놔두면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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