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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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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요즘은 시간을 자주 놓친다. 분명 저녁일 텐데도, 바깥은 아직 한낮처럼 밝다. 시계를 보기 전까지는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혹은 하루가 늘어난 것 같은 착각 속에 머문다. 잠깐, 정말 잠깐 시간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마 한여름이 되면 익숙해지겠지. 흐린 날이 끼면 그 착각은 더 짙어지고, 빛과 그림자 사이에서 시간은 더 조용히 스며든다. 이렇게 짧은 적응의 틈이 지나고 나면, 숨이 턱 막힐 무더위가 곧 찾아오겠지. 환한 빛이 만들어낸 시간착각의 마법이 지금 이 순간을 특별하게 만든다. 빛이 시간을 속이는 그 짧은 순간 속에서.
분홍신 1948년 발매된 영화 분홍신은 아카데미 미술상, 음악상을 받은 작품으로 반쯤 미친 고흐나 괴팍한 머리 모양의 아인슈타인의 인기를 마치 예술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래야 한다고 규정짓듯 인간의 예술에 대한 집착을 당시의 편견으로 그린 영화다. 등장인물이나 상황이 동화 모티브 그대로 일차적인 대신 영화는 주무대인 안데르센의 ‘분홍신(빨간구두)’ 공연을 관람할 수 있다. 엄청난 실험이었을 영화 속 15분이 넘는 순수 발레 공연 장면은 당시에 쓸 수 있는 모든 기술과 화려함. 부릴 수 있는 모든 사치를 부린 무대는 색채, 미장센, 음악, 동작이 놀라울 정도로 환상적이어서 스토리 개연성과 관계의 불편함은 잠시 접어두어도 될 정도이다. 15분의 공연으로 영화 전체 스토리를 짐작할 수 있는데, 스포도 아닌 스포를 ..
나는 진보인가 보수인가 체육관 선거가 있었던 시대, 민주주의가 미완의 상태였던 그 시절을 우리는 종종 비판한다. 하지만 그 시대를 살아낸 우리 부모님들이 불모지나 다름없던 이 땅을 오늘날의 대한민국으로 만들어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들의 한계와 문제점을 인정하면서도, 그 시대 사람들의 치열한 삶과 노력을 존중한다. 어르신들은 대체로 보수를 지지하고, 젊은 세대는 진보를 선호한다고 여겨져 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2030세대 중에도 현실적 보수 성향을 보이는 이들이 늘고 있고, 일부 기성세대도 변화에 열린 모습을 보인다. 정치 성향이 단순히 나이로 결정되는 시대는 지났는지도 모른다. 과거에는 통일이 당연한 숙원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무리한..
2025 여느 때와 다른 1월크고 거친 붓으로 화선지에 한 점 한 점 정성스레 찍는 속도로내 의지로 때론 그렇지 않게 모든 것이 지나갔다. 지겨우리만큼 혐오스러워 효능감이 떨어져 버린 정치도피해자만 남은 안타까운 사건도하나의 전쟁터가 되어 걱정스런 젊은이들도기본조차 기대할 수 없는 언론의 현실도어쩌면 나의 죽음일 수 있겠다 싶은 죽음도 돈이 되는 것들도게으른 행정과 전제검찰의 놀음도모두 가치도 의제도 없다. 이제야 내 집처럼 느껴지는 느림도, 파도 파도 깊어져야 하는 사랑 같은 이야기로 하루하루를 살아 선택의 폭이 그리 없음을 알면서도 계획을 세우고 의지를 다진다. 그리고 최선의 출발을 한다.정답도 없으면서.
같은 곳으로.. 남다 한 장의 사진으로 남은 허락된 매일의 풍경 젖은 바닥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맡으며어둡기에 더 선명해지는 불빛을 보며맑은 날의 하늘을 만지며 그대에겐 남을까무엇으로 남을까
흐름 일을 전혀 하지 않는, 아니 일상의 게으른 자극만으로 신경물질을 뿜어내며 시간을 보내던 나의 뇌는 어둠 속 소음이 잦아들면 조금씩 일을 했다. 다음 날, 그다음 날 리듬의 깨어짐을 알면서. 마음의 단어들이 많이 나왔다. 조각의 기억들을 정리하고 최대한 심플하게 구겨진 생각들을 다림질했다. 생각 행동 마음의 다 다른 영역들타고난 기질이 각기 다르고 상황에 따라 드는 여러 욕구.자신을 표현하거나 타인과 대화할 때의 수긍. 때론 기준이 달라 옳고 그름이 없는 감정에 부끄럽거나 수치심이 들기도 한다.감정을 생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노력. 덜 화내고 오해를 줄이기 위한 노력.감정적인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한 노력. 무심코 사용하는 어휘들 그러나 결국 행동은 달라야 한다는 말들. 결국 나는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
사랑목 비밀의 화원.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분명 멋지고 놀라운 걸 심어 둔. 그래서 물을 주고 봄이 오길 기다리면 드러나게 되는 비밀의 화원. 베일에 가려져 있던 화원이 10년 만에 열리면서 일어나는 이야기. 그런 화원이 나에게도 열렸다.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돋아나는 여린 잎들을 살피고. 숨 쉴 때마다 두리번거리면 찾게 되는 향기. 클래식한 편안함. 마법 같은 공간이 주는 행복. 두 아이가 서로의 슬픔을 외면하지 않고 고통을 이겨내며 서로를 치유하는 비밀의 화원처럼 텅 빈 나의 공간에 용기를 내어 은행목을 들여왔다. 식물은 먹는 것과 먹지 못하는 것으로 밖에 구별 못하던 나에게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화분도 사고, 마사토와 분토를 절반씩 섞여 분갈이도 했다. 사실 마사토를 섞여야 한다는..
관계맺기 초등학교 시절(사실은 국민학교) 나는 제법 친구가 많은 학생이었다. 그땐 지금과 달리 한 학급에 학생이 50명 가까이 되어서 나와 성향이 맞는 친구를 찾을 경우의 수도 높았고, 공부를 잘하기만 해도 기본 존중을 받는 시절이었다. 모든 남학생들은 점심시간에 축구를 하거나 야외에서 뛰어놀아야 “정상” 범주였고, 국민들이 다 함께 보는 드라마, 다 같이 부르는 유행가가 있어서 따로 대화의 소재를 찾는다던가 나의 특이성을 표현해야 한다던가 혹은 요즘 핫한 게 어떤 건지 알기 위해 SNS를 열심히 해야 하는 부담도 없었다. 오히려 다양한 취미나 취향, 마이너한 성향은 무시당하기 일쑤. 그저 채널 4개밖에 없는 TV에서 요즘 방송되고 있는 게 뭔지만 알고 있으면 문화적 동질성에서 뒤처지지 않았고, 같은 반이기만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