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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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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없어서 신불산 억새평원을 걸어 보겠다고 작정하고 나선 날, 내가 가장 오래 들여다본 것은 억새가 아니라 주차할 자리였다. 주차장 두 곳이 모두 가득했다. 올라가는 길에도 차가 줄지어 있었고, 내려오는 길도 사정은 같았다. 한 자리라도 비면 세울 생각이었지만 그런 자리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새벽에 출발해야 하나. 가을이면 능선마다 억새가 펼쳐진다는 신불산. 억새를 보러 온 사람이 많다는 건 알았지만 그들이 타고 온 자동차까지 헤아리게 될 줄은 몰랐다. 결국 차를 돌렸다. 집으로 가기엔 아쉬웠다. 억새를 보려고 나선 길인데 아직 한 포기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때 태화강의 억새밭이 떠올랐다. 명촌억새군락지. 이름은 알아도 가 본 적은 없는 곳이었다.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했다. 도착해서도 억새밭으로 드는 ..
공기처럼 있다가 https://www.youtube.com/watch?v=tlqboJp0bFY 공항에 앉아 있으면 온갖 언어가 들린다. 그런 곳에서 오히려 나에게 더 집중하게 된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주변이 낯설어질수록 나는 조금 희미해지고, 그때 내 쪽이 선명해진다. 이번 여행은 처음부터 그런 식이었다. 급하게 떠났다. 국제운전면허증도 만들지 못했다. 차 대신 자전거를 생각했고 네 시간을 빌렸다. 여덟 시간도 잠깐 망설였다. 혼자 그 긴 시간을 어디에 쓸지 아니, 자신이 없었다는 말도 정확하진 않다. 그냥 가늠이 안 됐다. 타는 동안엔 핸드폰을 쓰지 말라고 했다. 다른 장비도 없었다. 그래서 사진도 영상도 남기지 못했다. 넉넉한 자전거도로를 달렸다. 차가 거의 없는 길을 지나 논 사이로 들어갔을 때는 행복하다는 ..
가까운 타지, 경주 경주는 가깝다. 너무 가까워서 여행을 준비한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는다. 울산에서 차로 북쪽을 향하면 그만이다. 벚꽃이 피면 가고, 보문에서 밥을 먹고, 황리단길을 걷는다. 마음만 먹으면 불국사와 석굴암도 반나절이면 다녀올 수 있다. 그렇게 가까이 두고 살아도, 경주를 '천 년 가까이 한 나라의 수도였던 도시'로 여기며 간 적은 많지 않다. 경주는 경상북도다. 울산은 광역시이고 경주는 경북이다. 붙어 있어도 뉴스가 다르고 행정이 다르고 정치가 다르다. 멀지 않지만 우리 지역은 아니다. 내게 경주는 오랫동안 그런 곳이었다. 가까운 타지. 그런데 신라 시대로 들어가면 지금의 경계는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당시 중심은 경주였다. 왕이 있었고 궁궐이 있었고 큰 절이 들어섰다. 지금의 울산은 그 왕경이 바다와 만나는..
J의 일탈, 오후 5시 34분 토요일 오후, 하던 일을 셀프 마감하고 잠시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런데 문득 엉뚱한 생각 하나가 들었다. 차에 기름이 얼마나 있지? 그 생각이 왜 거제로 이어졌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거제였다. 늘 메고 다니는 가방에 옷 한 벌을 넣었다. 오후 5시 34분, 집을 나섰다. 거제로 가는 건 정했지만 어디로 갈지는 정하지 않았다. 도착하면 늦은 저녁일 테니 그 지역 음식을 먹고 싶었다. 그래서 고현시장을 목적지로 잡았다. 그렇게 별 준비 없이 시작한 길인데 거제로 들어가는 과정부터 새로웠다. 다리를 건너고 바다 밑을 지나 다시 다리와 터널을 만났다. 거가대로의 가덕해저터널은 바다 밑 암반을 뚫은 것이 아니라 육상에서 만든 구조물을 바닷속에 가라앉혀 연결한 침매터널이다. 알고 나면 지나온 길이 조금 달리 느껴..
제주, 혼자 제주는 혼자 온 사람을 잘 숨겨준다.그렇다고 위로하지는 않는다. 도착해 처음 들어간 커피숍, 창가 자리였다. 햇빛이 테이블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고, 커피 잔 옆에 그림자가 하나 생겼다. 충전기를 꽂아두고서야 자리에 제대로 앉았다. 왜 여기 있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됐다. 혼자 간다는 건 목적지보다 함께 가는 사람이 먼저 떠오르던 그 습관을 부수는 일이다. 어쩌면 장면의 소유권을 되찾는 일에 가까운. 오래전부터 알던 친구를 만났다. 내게 탈출 같은 시간이 그에겐 그냥 사는 곳이라는 사실. 그 간격이 묘하게 편안했다. 친구가 하는 술집에 들어서자 레트로한 조명이 낮게 깔려 있었다. 자리에 앉으면 어깨가 먼저 내려앉는 그런 공간이었다. 술이 한 잔씩 쌓이는 동안, 한 번도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부끄럽지 ..
홋카이도에서 홋카이도에서 무릎까지 차오른 습기 없는 눈에 해가 비치면 세상이 애니메이션처럼 보인다. 한 뼘 간격으로 보석 같은 결정이 반짝거리고, 그 반짝임이 눈앞 공기에서도 느껴진다. 눈은 땅에만 쌓여 있는 게 아니라, 시선과 숨 사이에도 떠 있다. 시선을 조금 멀리 보내면 반사된 햇살에 새하얀 언덕이 드러나고, 어린 시절 TV 속에서만 보던 뽀로로 마을에 와 있음을 그제야 알게 된다. 현실인데, 기억처럼 보인다. 밟아본다. 교과서처럼 뽀드득 거린다. 발을 떼고 다시 내린다. 뽀드득. 같은 자리에 다시 발을 올려도 소리는 늘 조금씩 다르다. 눈이 계속 내리는 중인데도 발바닥 아래에서는 매번 새로운 저항이 느껴진다. 눌린 눈과 눌리지 않은 눈이 층을 만들고, 그 위에 내가 한 장 더 얹힌다. 눈 벽에 파묻혀 넓었던 ..
오키나와 沖縄 뜨겁고 습한 우리의 여름과 날씨가 비슷한 일본은 여름 여행 장소로는 별로 추천을 받지 못한다. 볕 뜨거운 여름에도 잔소리가 있어야 겨우 바르는 썬블럭을 챙겨 들고, 늦은 봄 오키나와를 다녀왔다.오키나와는 일본안에서도 본토와는 다른 역사를 지닌 섬나라다. 우리 역사 속에서도 여러번 단독으로 등장하는 곳이고, 일본에 정복당한 후 가장 치열한 태평양 전쟁의 장소가 된 곳이다.지리적으로 동중국해와 태평양 사이에 위치하며 특히 긴장감이 감도는 대만의 옆이라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으로, 크기와, 인구, 인구밀도까지 울산과 비슷한 이 섬나라의 첫인상은 일본이되 무언가가 다른 일본이다. 야밤에 태국 공항에 도착해본 사람이라면 느꼈을 이질적인 공기처럼 마치 진이 빠져나갈 듯한 습함이 우리를 맞이한다.피부의 끈..
후쿠오카1 (2022. 12.)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후쿠오카를 처음 방문한 것은 작년 12말. 나는 한 해의 마무리를 후쿠오카에서 했다. 못키리 스타일을 경험하고픈 큰 뜻을 품고. 후쿠오카 공항에서 내려 캐리어를 끌고 숙소로 걸어가는 길에 첫 끼니로 오코노미야끼를 시켜 두고 생맥주를 마셨다. 토리아에즈나마비루! (일단 생맥주!) 일본 드라마에서만 보던 일단 생맥주! 흉내 내었는데, 살짝 땀을 흘린 상태에서 생맥주의 목 넘김이란...... 아직 후쿠오카를 둘러보지도 않았지만, 정말 ‘오길 잘했다’란 만족감이 들었다. 유명 관광지도 좋지만, 현지의 공기를 더 느껴보고 싶어 숙소 근처 골목들을 빠른 걸음으로 훑고 다녔다. 그러다 눈에 띈 오레노다이도코로(내부엌)라는 간판. 도무지 안을 알 수 없는 작은 이자카야 앞에서 두어 걸음을 앞뒤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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