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태백산맥, 화개장터,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나와 비슷한 시기에 고등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마음속에 지리산이 있을 것이다. 가보진 않았지만 왠지 민족정기가 흐르고, 삶을 살아가는 사람.. 그러니까 민중인 사람이 있는 그 곳.
고향도 아닌데 향수를 자극하는 곳, 지리산.
여름을 마지막을 장식하는 곳 하동 쌍계사 계곡에 발을 담그러 다녀왔다.
대학 때처럼 지리산을 오를 자신은 없고, 그저 쌍계사까지 슬슬 걷기와 쌍계사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면 좋겠다 싶어 긴긴 시간 차를 몰았다.
쌍계사 계곡은 단연 내가 본 계곡 중 가장 큰 계곡이다. 근 바위와 돌들이 깊은 산 바로 밑 계곡임을 말해주지만 크기는 계곡이 아니라 강이다.
계곡에 들어가기는 벌써 추워서 물놀이를 하는 가족은 안 보이고, 발을 조금 담그거나 주변을 걷는 사람만 보는데, 8월 초였다면 아마 이 계곡 가득 사람들이 와글와글 했을 거다.
사람이 없는 대신 물소리가 사방을 채워, 바로 옆 사람과 말을 할 때도 소리를 높여야 할 지경이다. 역시 시원하다.
지리산 쌍계사는 신라 성덕왕 21년에 세워졌다. 처음에는 옥천사라 하였는데, 두 개의 계곡이 만난다 하여 정강왕이 쌍계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쌍계사 입구에 벌써 꽃무릇의 꽃대가 보인다. 아직 만개하지는 않았지만, 꽃무릇이 있을 줄 알았으면 2주만 더 늦게 올 걸 그랬다고 생각될만한 양의 꽃대가 있었다. 추석 무렵에 오면 만개한 붉은 꽃은 볼 수 있으리라.
괜히 선물을 받은 것 같아 기분이 더 좋아졌다.
일주문을 들어가 작은 계곡을 건너면 바로 금강문이다. 앗! 또 꽃무릇이다.
108계단을 오르는 곳곳에 꽃이 보인다.
쌍계사는 가을에 와야 하는 절이었구나.
고요한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기에는 코스모스와 늦게 남은 봉숭아, 그리고 여기저기 꽃무릇이 너무 예쁘다.
가을에 꼭 다시 오고 싶은 곳으로 마음속 메모장에 적어둔다.
사실 하동에 내려온 이유는 소설 토지의 배경인 최참판댁에서 섬진강을 바라보기 위해서였다.
어렸을 땐 드라마의 세트장인 최참판댁과 평사리를 보고 서희의 모델이 누군가 있었다고 생각했었다. 소설이라기엔 서희도 길상이도 귀녀도 바우할아범도, 임이네 월선이 윤보, 이평.. 한 명 한 명의 삶이 모두 주인공인 것처럼 생생했기 때문이다.
토지의 배경인 동학농민전쟁, 을사늑약, 청일전쟁, 간도협약, 만주사변 등은 조사하고 공부하여 쓴다고 하더라도 그 인물 하나하나가 다 작가의 상상에 의해서라니 감히 짐작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2부의 배경인 간도는 한 번도 가보지도 못한 곳이라고 한다.
어떻게 사람을 관찰하고 내면을 상상해야 그 600여 명의 인생이 탄생하는 것인지, 박경리 작가님의 다른 모든 소설들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을 다 모아도 토지에 대한 존경만은 못할 것이다.
세트장으로 올라가는 길에 그늘이 하나도 없다. 역시 여기도 가을에 와야 한다.
이번에도 최참판댁에 올라서 멀리 섬진강과 평사리를 내려다보며 서희와 윤씨부인이 되어 본다. 아무래도 평사리의 땅을 품고 그 사람들을 품기에는 내가 부족하다.
사람이 사람을 책임지고 결정하기에는 내 그릇이 작던, 내가 너무 상대를 존중하던지 둘 중 하나다.
언젠가 토지를 필사하고 싶다.
그 생생한 글귀를 필사하면서 다시 한번 토지 속 사건들, 인물, 그 시대와 공간에 빠져들고 싶다.
지금 당장 시작하지 못하는 못난 나
오늘의 나는 용기 없고 날카롭기만 최치수다.
내일은 선하고 우직한 이용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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