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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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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증거가 되는 관계 언어의 민감함은 장마 전의 날씨를 닮았다. 아직 아무것도 내리지 않았는데 몸이 먼저 안다. 공기가 무거워지고, 셔츠가 등에 붙고, 사람들은 저마다 하늘을 한 번씩 올려다본다. 어떤 관계에서 나는 그 날씨를 먼저 감지하는 사람이었다. 농담 하나, 늦은 답장 하나, 말끝에 붙은 조사 하나에서 습기를 읽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미 불쾌한, 그런 계절이 관계 안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 처음의 길은 곧았다. 넓지 않아도 충분했고 빠르지 않아도 닿았다. 그 길이 어느 해부터 포장을 잃었다. 자갈이 생기고, 굽이가 생기고, 나중에는 산길이 되었다. 길이 험해진 것인지 내 걸음이 조심스러워진 것인지 지금도 정확히는 모른다. 다만 그때부터 나는 말을 오래 만지기 시작했다. 이 말은 건너도 되는가. 이 침묵은..
그렇게 깎아서 나아지는 것은 없다 대표팀이 돌아오던 날, 공항에는 사람을 맞으러 나온 이보다 사람을 밀어내려는 말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졌으니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하다. 감독은 약자가 아니다. 연봉도 권한도 그에게 있었다. 가진 만큼 책임도 그의 몫이다. 다만 한 경기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한 대회 전체를 지나며 드러난 준비, 판단, 반복된 실패를 묻자는 것이다. 그런데 화면을 떠도는 말들은 자꾸 다른 쪽으로 갔다. 나가라. 다시는 오지 마라. 출입 금지. 솔직히 첫 짤에는 나도 웃었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같은 얼굴이 같은 방식으로 계속 깎이고 있었다. 비판이라면 한 번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멈추지 않자, 비판처럼 보이던 것이 다른 무엇으로 바뀌어 있었다. 웃지 못하면서도 화면을 끄지 못한 그 시간이, 처음의 웃음보다 더 마음..
일이 앞으로 가는 방식 아침에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대단하지 않다. 해야 할 것들을 적는다. 어제 넘어온 것, 오늘 끝내야 할 것, 아직 결정을 기다리는 것, 누군가에게 확인해야 할 것. 적는 순간, 머릿속에서 떠다니던 일이 바깥으로 나온다. 눈앞에 놓이면 일의 표정이 달라진다. 급해 보였던 것이 사실은 기다려도 되는 것일 때가 있고, 조용히 밀려 있던 한 줄이 하루 전체를 붙잡고 있을 때도 있다. 바쁜 일만 보다 보면 빠진 일을 놓친다. 메모는 기억을 돕는 도구라기보다, 생각을 현실로 끌어내리는 장치에 가깝다. 좋은 아이디어 하나가 곧바로 결과가 되는 경우는 드물다. 방향이 있어도 모양이 없으면 흩어지고, 모양이 있어도 사람이 움직이지 않으면 문서로 남는다. 생각을 문장으로, 문장을 자료로, 자료를 일정으로, 일정을 사람의 ..
멸종위기사랑 인간은 원래 떠돌던 종이었다. 계절을 따라, 먹이를 따라. 오래 머무르면 죽었다.그 인간을 멈춰 세운 건 불이었다.불이 생긴 뒤, 인간은 밤에도 한 장소에 남았다. 어두워지면 돌아왔고, 작은 불 주변으로 모여 앉았다. 거기서 기다림이 생겼다.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을 걱정하는 마음, 돌아온 얼굴을 보고 안도하는 감각.누군가를 기다리기 위해 돌아오고, 같은 얼굴을 반복해서 보기 위해 한 장소에 머무는 것. 어쩌면 사랑은 그때 시작된 본능이지 않을까. 멸종위기사랑을 들으며 이상하게 그 장면이 보였다. 노래는 사랑을 이야기하는데 자꾸 인간의 오래된 밤이 떠올랐다.가사에 이런 말이 나온다. 한 사람당 하나의 사랑이 있었다고.그 순간 사랑이 감정이 아니라 자원처럼 느껴졌다. 누구에게나 단 하나만 주어진 불씨. 잘못..
출정식 비는 새벽부터 내리고 있었다.젖은 도로 위로 가장 먼저 지나간 건 출근 버스보다 유세차였다. 아직 상가 셔터도 다 올라가기 전인데 스피커에서는 이미 선거송이 흘러나왔다. 교차로를 돌 때마다 기호 다른 번호의 차량들이 하나둘 모여들었고, 비옷 입은 사람들이 음악 박자에 맞춰 팔을 흔들었다. 하나같이 귀에 남는 멜로디였다. 한 번 들으면 하루 종일 머릿속 어딘가를 맴돌 것 같은, 이른바 수능금지곡 같은 리듬. 비 오는 아침인데도 사람 몸을 먼저 움직이게 만드는 종류의 소리였다. 나도 모르게 손이 올라갔다가, 잠깐 웃음이 났다. 오늘부터 공식선거운동이 시작됐다. 사람들은 흔히 이 날을 시작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캠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오늘은 시작이라기보다 준비가 끝나는 날에 가깝다. 지금까지는 설계하고 정..
아버지 임종실에는 창도 티비도 시간도 없었다. 대신 숫자가 있었다. 심박수, 산소포화도, MAP, RR. 모니터는 쉬지 않고 사람의 상태를 숫자로 번역했다. 삐, 삐, 삐. 1분에 한 번씩 울리는 경고음은 병실의 공기가 아니라 신경을 흔들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눈을 감아도 들렸다. 사람은 소리에 이렇게 갇힐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계속 모니터를 봤다. 아버지를 한번 보고, 숫자를 한번 보고, 다시 아버지를 봤다. 기계는 계속 숫자를 말하는데, 그 아래에는 사람이 있었다. 아버지는 젊을 때 SK 섬유공장 관리직이었다. 그 시절 공장 기계는 대부분 일본제였고, 출장도 조립도 아버지가 맡았다고 했다. 일본에서 부품이 오면 혼자 분해하고 다시 조립했다. 머리가 좋고 손재주가 좋았다. 내 유치원 행사 무대 글씨도..
. 4.16이다. 또, 라는 말이 먼저 나온다. 나도 그렇다. 세상은 그새 여러 번 무너지고 쌓였고, 사람들은 바쁘게 슬퍼하고 바쁘게 잊었다. 나도 한 번 그 말 속으로 들어가 봤으니까. 그런데 못 넘어간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설명할 수 있으면 진작 넘어갔을 것이다. 화면이 있었다. 반복해서 재생되는 장면들. 나는 그것들을 편집했다. 지하 사무실에서, 혼자, 보고 또 보면서. 영상은 잘려야 했고 나는 계속 잘랐다. 어디서 끊어야 하는지 몰랐다. 편집이란 원래 끝이 없다. 그냥 어느 날 그만두는 게 끝이다. 기억도 그런 것 같다. 오늘도 누군가는 그 이름 앞에서 멈출 것이다. 멈추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 채로.
당연한 것이 무너지는 순간 오늘 아침, 한 남자가 전쟁의 경과를 보고했다. 핵심 전략 목표가 거의 완수되었다고 했다. 해군은 소멸되었고, 미사일 생산 능력은 파괴되었으며, 곧 끝날 것이라고 했다. 그 직전에 그는 휴전을 거부했다. 상대를 완전히 소멸시키고 있는 중에 휴전은 하지 않는다, 는 것이 이유였다. 그 문장은 논리적으로 완결되어 있었다.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전쟁은 항상 설명과 함께 온다. 역사적 맥락, 안보 논리, 동맹 구조, 에너지 이권. 설명이 정교할수록 죽음은 점점 더 납득 가능한 것처럼 다루어진다. 그 납득의 과정이, 사실은 가장 위험한 일이다. 작전명이 붙고, 목표가 번호를 달고, 진척률이 백분율로 환산되는 순간, 전쟁은 프로젝트가 된다. 프로젝트에는 비극이 없다. 지연과 초과 비용만 있을 뿐이다. 나는 전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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