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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영화

시간이 쌓이는 방식 - '은중과 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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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연휴에 넷플릭스를 켰다. '은중과 상연'. 아역배우 연기가 좋다는 말에 시작한 몰아보기는 오래 이어졌다.

 

이 드라마는 1990년대 초등학교에서 만난 두 소녀가 마흔을 넘기기까지, 삼십 년의 시간을 가로지른다. 류은중과 천상연. 두 사람은 친구였다. 동경하고, 질투하고, 사랑하고, 헤어졌다. 함께 웃고 울고, 서로를 베고, 다시 만나고 헤어졌다. 사랑이 구원이 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시점이 바뀐다. 은중에서 상연으로. 화자가 바뀌면 같은 장면이 다르게 보인다. 방금 전까지 이해했다고 생각한 장면이 다른 인물의 목소리로 다시 들리면 가슴이 조여든다. 이런 기법을 쓰려면 배짱이 있어야 한다. 잘못하면 산만해지고, 자칫하면 기교만 남는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확신에 차 있다.

 

초반의 축은 상연 남매다. 상연과 오빠 천상학. 중반부터 김상학이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더욱 얽히고 설킨다. 김상학은 흔들리는 관계들 사이에서 균형추처럼 작용한다. 네 사람은 서로를 무너뜨리고 다시 세운다.

 

상연은 겉으로 보기엔 다 가진 사람이었다. 예쁘고, 똑똑하고, 집안도 좋았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았고, 사랑받는 법을 알았다. 하지만 내면은 달랐다. 자격지심과 피해의식이 그녀를 잠식했다. 은중이 나타났을 때, 상연은 처음으로 자신이 가진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은중은 가난했지만 자유로웠다. 상연은 부유했지만 갇혀 있었다. 은중이 있으면 상연의 세계는 흔들렸다. 동경과 질투가 한 몸처럼 붙어 있었다. 사랑과 미움의 경계가 흐려졌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이상하다. 타인에게는 진실하면서 서로에게는 왜 그럴까. 둘이 만나면 칼날이 선다. 가장 솔직해지는 순간이 가장 잔인해지는 순간이다. 특히 상연은 타인도 스스로도 괴롭힌다. 보는 내내 아프고, 안 보고 싶기도 하다.

 

"왜 그렇게까지 해?" "그냥 잊으면 되잖아." 정상세계를 사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누군가를 이렇게 원망하고, 이렇게 그리워하고, 이렇게 질투한다는 게 어떻게 한 사람의 중심을 송두리째 흔들어놓는지를.

 

두 사람은 똑똑하다. 은중과 상연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 숨이 막힌다. 둘 다 상대의 약점을 정확히 안다. 어디를 찌르면 아픈지, 어떤 말을 하면 무너지는지 알고 있다. 그래서 더 잔인하다. 십대의 서툰 말싸움이 사십대가 되면 정확한 급소를 겨냥하는 칼날이 된다.

 

"어차피 넌 이해 못 해"

이 말은 대화의 종료를 선언한다. 너는 내 세계에 없다는 뜻이다. 이해하기 때문에 이해받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서로의 내면을 너무 잘 알아서, 그 내면이 얼마나 복잡하고 어두운지 알아서, 함부로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똑똑한 사람들의 우정은 이렇게 무섭다.

 

두 사람은 두 번의 절교를 거친다. 그 절교의 이유가 극적이거나 과장되지 않다. 미워서가 아니다. 그냥 그 나이대가 그랬다. 그 시절이 그랬다. 십대의 서툰 오해, 이십대의 각자 다른 속도. 절교는 폭발이 아니라 어긋남에서 온다.

 

고증이 정확하다는 건 소품 이야기가 아니다. 그 시절 사람들이 실제로 그런 식으로 아파했고, 그런 방식으로 사랑했다는 뜻이다. 십대가 나누는 대화는 서툴다. 말끝을 흐리고, 눈을 피하고, 돌려 말한다. 이십대가 되면 조금 더 직선적으로 상처를 주고받는다. 삼십대에 이르면 침묵이 말보다 많은 것을 전한다.

 

이 드라마는 그 미침을 판단하지 않는다. 미화하지도, 비난하지도 않는다. 다만 사진 같은 영상으로 보여줄 뿐이다. 사람이 이렇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우정이 이렇게 파괴적일 수 있다는 것을.

 

후반 3~4회는 필요하지만 불필요하게 느껴진다. 이십대 절교에서 바로 마무리하면 어땠을까. 그 긴 시간이 주는 무게보다, 짧은 여운이 더 강렬하지 않았을까.

 

그 두 사람은 안 보고 살면 그만인데 왜 이렇게 얽히고 설킬까. 삼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맴돈다. 우리는 정말 성장하는가, 아니면 상처를 더 능숙하게 다룰 뿐인가.

그런데 마지막은 왜 또 서로일까.

 

니가 신경 쓰이고, 밉고, 사랑하고, 갖고 싶고, 파괴하고 싶다. 그 모든 감정이 한 사람 안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이 드라마는 답하지 않는다. 다만 시간이 쌓이는 방식을, 사람이 늙어가는 모양을 보여줄 뿐이다. 열다섯 살의 상처가 마흔다섯 살의 몸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을, 첫 우정의 기억이 중년의 가슴에도 여전히 뜨겁다는 것을.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떤 이야기는 답 없이도 오래 남는다.

 

둘의 대화만, 은중의 독백만 추려 읽을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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