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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영화

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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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중국을 휩쓴 문화대혁명은 단순한 정치 운동을 넘어 한 문명의 근간을 뒤흔든 대참사였다. 마오쩌둥이 주도한 이 혁명은 '구습타파'라는 명목 하에 지식인들을 탄압하고, 수많은 서적과 문화재를 불태웠으며, 전통 문화의 맥을 끊어놓았다. 홍위병이라 불린 젊은이들은 스승을 고발하고, 이웃을 밀고했으며, 가족마저 서로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무수한 지식인들이 감옥에 갇히거나 농촌으로 추방당했다. 10년은 중국이 근대화의 길에서 크게 뒤처지게 만든 암흑기였고, 그 상처는 오늘날까지도 중국 사회 깊숙이 남아있다.

 

넷플릭스 삼체는 바로 이 역사적 트라우마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다. 물리학자 예원의 아버지가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들에게 맞아 죽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이 드라마는, 한 개인의 상처가 어떻게 인류 전체의 운명을 바꾸는가를 그려낸다. 예원은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후 인류에 대한 절망을 품게 되고, 비밀 연구소에서 외계 문명과 접촉을 시도하다가 실제로 삼체 문명으로부터 응답을 받는다. 그녀는 결국 삼체 외계인들에게 지구의 좌표를 알려주며 인류의 멸망을 자초한다.

 

시간은 현재로 넘어가 옥스퍼드 대학의 젊은 과학자들이 등장한다. 진청, , 사울, 어거스틴, 윌은 모두 같은 연구실에서 함께 공부한 동료들로, 각자의 전문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인다. 나노과학자 어거스틴이 자신의 연구에 의문을 품고 자살하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그녀가 남긴 카운트다운은 다른 과학자들에게도 나타나기 시작하고, 이들은 점점 기괴한 현상들을 경험하게 된다.

 

이들이 접하게 되는 삼체라는 VR게임은 작품의 핵심 장치다.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들은 불규칙한 세 개의 태양 때문에 문명이 반복적으로 멸망하는 행성의 주민이 되어, 매번 다른 방식으로 문명을 재건해보지만 결국 실패하는 경험을 반복한다. 진청은 이 게임을 통해 삼체 문명의 실체와 그들이 안정적인 행성을 찾아 지구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드라마를 보며 인상적인 것은 각 캐릭터들의 자연스러운 상호작용이다. 옥스퍼드 동료들 사이의 농담과 경쟁, 서로에 대한 걱정과 애정이 매우 현실적으로 그려진다. 진청이 게임에 몰두할 때 친구들이 보이는 우려, 어거스틴의 죽음 앞에서 각자가 보이는 다른 반응들, 위기 상황에서도 서로를 지키려는 모습들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연결된다.

 

하지만 나는 이 드라마를 단순한 SF 스릴러가 아닌 문화대혁명의 기록화로 읽었다. 예원의 눈빛이 오래 머무르는 순간들에서, 나는 말로 표현되지 않은 역사적 상처를 느꼈다. 연구실의 불빛이 하나씩 꺼질 때의 적막, 누군가 급히 떠난 집 앞에 남은 신발 한 켤레, 태워진 책들의 잔해 이런 작은 디테일들이 그 시대의 공포와 상실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침묵의 사용법이었다. 말하지 않는 것이 더 무섭다는 것을 이 드라마는 정확히 안다. 문화대혁명의 진짜 유산은 '입 다물기'. 누구도 그 시절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마치 집단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모든 것이 침묵 속에 묻혀있다. 예원이 아버지의 죽음 이후 보여주는 침묵, 과학자들이 설명할 수 없는 현상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 진실을 알게 된 후에도 누구에게 말할 수 없는 고립감 이 모든 것이 그 시대의 트라우마와 연결된다.

 

만약 문화대혁명이 없었다면 중국은 수천 년간 축적된 지식과 문화유산을 그대로 보존하며, 지금보다 훨씬 다른 모습의 문명을 이루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에 가정법은 없다. 상처는 이미 새겨졌고, 그 상처가 예원을 통해 우주적 규모의 복수로 되돌아온다.

 

결국 삼체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삼각구조를 이룬다. 예원의 선택은 개인적 복수를 넘어 역사적 트라우마의 폭발로 읽힌다. 삼체 문명의 침입은 외부의 위협이 아니라, 한 문명이 자신의 지식인과 문화를 파괴했을 때 그것이 시간을 초월해 되돌아오는 필연으로 보인다. 그것이 400년 뒤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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