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분의 여정이 끝나고도, 커튼콜의 환호성보다 더 오래 내 가슴을 두드린 건 무대 위 한 사람의 두 얼굴이었다. 순수하고 이상적인 지킬 박사와 폭력과 쾌락에 탐닉하는 하이드. 서로 닿을 수 없는 평행선처럼 보이지만, 실은 한 사람 안에 함께 살아 숨 쉬고 있는 존재들이다.
이 뮤지컬이 다루는 선과 악의 이중성은 단순히 어떤 사람이 때로는 착하고 때로는 나쁘다는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안의 선과 악이 항상 공존하며, 한쪽을 없애거나 부정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다. 악은 외부에서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 속 깊이 뿌리내린 일부임을 보여준다. 하이드는 사회가 억압해 온 욕망, 분노, 이기심의 화신이다. 그렇다면 나의 하이드는 무엇일까?
무대를 바라보며 깨달은 것은 인간의 선과 악은 원래 섞여 있는 성질이라는 점이다. 현실 속 인간은 친절함과 야망, 분노와 연민, 욕망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선한 행동 속에도 이기심이 섞일 수 있고, 때로는 정의를 위해서도 강한 분노나 공격성이 필요하다. 인간성은 바로 선과 악이 함께 존재하는 데서 비롯되며, 한쪽을 완전히 없애려 하면 결국 자신을 파괴하게 된다는 메시지가 강렬하게 다가왔다.
무대 위에서 울려 퍼지는 〈지금 이 순간(This is the Moment)〉.
두려움과 의심을 지우고, 스스로 운명을 선택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이 순간이 왜 중요한지, 내 삶의 절정이자 모든 것이 결정되는 때임을 인지하게 하는 노래. 그리고 왜 이 OST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지 자연스레 전율을 느끼며 알 수 있었다. 배우의 깊이 있는 감정 표현과 웅장한 선율이 어우러져 극장 전체가 하나의 감정으로 통일되는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이 뮤지컬의 키워드를 꼽는다면 ‘나도 몰랐던 나’가 아닐까 싶다.
극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170분이었다. 혼자일 때 가장 있는 그대로의 내가 보이고, 그 순간 나의 하이드와 나의 헨리 지킬이 모두 느껴진다. 사회적 가면을 벗은 채 마주하는 내면의 모습들, 때로는 부끄럽고 때로는 놀라운 그 다면적 존재로서의 나 말이다.
한 사람이 완전히 다른 두 인격을 오가며 보여주는 목소리 톤, 몸짓, 표정까지.
적지 않은 금액으로 본 뮤지컬이지만, 뮤지컬 마틸다가 600대 1의 경쟁률을 자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이들의 무대 위 존재감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또 티켓값이 전혀 비싸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지킬이면서 동시에 하이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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