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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

투표장을 향하는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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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를 안 하는 사람에게 왜 안 가냐고 물으면 대답은 대개 같다.

어차피 다 똑같아.

 

이 말은 귀찮다는 뜻이 아니다.

여러 번 기대했다가, 여러 번 실망했고, 그래서 더 기대하지 않기로 마음을 정리한 뒤에 나오는 말이다.

무관심이 아니라 정리다. 마음을 접은 상태.

 

그래서 어떤 사람은 아예 가지 않는다.

가봤자 달라지는 게 없다는 느낌이 이미 몸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한 번도 안 가본 사람이 아니라, 가본 사람에게서 더 자주 나오는 태도다.

 

반대로 투표장까지 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놀라울 만큼 비슷하다.

대단한 결심을 한 표정이 아니다.

장 보러 나온 사람처럼, 그날 해야 할 일을 하러 온 얼굴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는 전혀 다른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

 

누군가는 마음이 걸려서 간다.

좋아서가 아니라, 그냥 놔두면 내가 손 놓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

별 기대는 없는데, 아무것도 안 했다는 찝찝함은 더 싫어서 간다.

투표를 하는 게 아니라, 자기 마음의 빚을 조금 덜어내러 가는 느낌이다.

 

누군가는 손해 보기 싫어서 간다.

세상이 좋아질 거라는 생각은 별로 없다.

다만 내가 가만히 있는 사이에 누가 내 삶을 건드릴까 봐,

그래서 그냥 덜 불안한 쪽에 표를 얹는다.

선택이라기보다 자기 방어에 가깝다.

 

누군가는 그냥 원래 하던 대로 한다.

생각을 새로 하는 게 귀찮아서가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 정해진 마음을 굳이 다시 뒤집고 싶지 않아서다.

그 선택이 맞는지 틀린지보다,

이 나이에 내가 또 바뀌는 게 더 어색하게 느껴진다.

 

반대로 매번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도 있다.

겉으로 보면 흔들리는 것 같지만,

정작 본인은 그때그때 가장 솔직했다고 느낀다.

 

문제는 그 이유를 또렷하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번엔 그냥 이쪽이 나은 것 같아서.”

 

것 같아서안에는 수많은 순간들이 들어 있다.

뉴스 한 장면, 말투 하나, 표정 하나, 분위기 하나.

논리로 정리되지는 않지만 마음을 기울게 만든 경험들.

 

사람은 판단하고 나서 이유를 만든다.

이성적으로 결정했다고 믿고 싶기 때문에.

 

그래서 선거가 가까워지면 설명하기 어려운 공기가 생긴다.

누가 지시한 것도 아닌데, 비슷한 말들이 돌기 시작한다.

 

이번엔 좀 바뀌어야 할 것 같고,

이번엔 그냥 조용했으면 좋겠고.

 

각자는 자기 생각이라고 느끼지만,

사실은 비슷한 피로와 비슷한 불안을 공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공약보다 인상 하나가 더 오래 남는다.

사람은 정책을 비교하기 전에, 먼저 마음이 편한지 불편한지를 느낀다.

그 감각이 결정되고 나면, 정보는 그다음에 따라온다.

 

선거가 끝나면 늘 이런 말이 나온다.

민심이 변했다.

 

하지만 정말 변한 걸까.

 

사람이 갑자기 달라졌다기보다,

그 사람들이 그 시기에 느꼈던 무게가 달라진 것에 가깝다.

 

같은 사람이

다른 시간 속에서

다른 현실을 견디며

다른 선택을 한 것.

 

투표는 거대한 의사의 표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주 개인적인 감정들의 합이다.

 

각자의 사정, 각자의 기억, 각자의 계산과 체념이

잠깐 같은 날 겹쳐진 결과.

 

투표소를 나오는 얼굴이 담담한 이유도 그래서다.

세상을 바꿨다는 표정이 아니라,

자기 몫의 결정을 끝냈다는 표정.

 

우리는 그 조용한 선택들의 합계를

민심이라고 부른다.

 

거창한 단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놀랄 만큼 개인적인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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