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중하다 보면 문득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리는 때가 있다. 생각이 안 나는 게 아니라, 더 이상 집어넣을 자리가 없어서 생기는 과부하에 가깝다. 아이디어는 문밖에서 서성거리는데, 머릿속엔 '메모리 부족'이라는 무심한 경고등만 반복해서 뜨는 요즘이다.
이 감각의 시작은 의외로 아주 조용했다.
나란히 앉아 시간을 보내다 우연히 마주친 사진 몇 장. 이미 지워진 줄 알았던 그 장면들을 곁에 있는 이가 조용히 꺼내 보여주었다. 오래전 함께 보냈던 시간들. 그때는 모든 게 새로워서 더 날카롭게 설렜던 순간들이다. 사진은 낡았는데 그걸 바라보는 마음은 이상할 만큼 생생했다. 요즘처럼 설렐 일이 드문 시기라 그런지, 그 찰나의 장면이 생각보다 깊은 자국을 남겼다.
그 설렘이 나를 과거 쪽으로 슬쩍 밀어냈다.
아주 오랜만에 서랍 깊숙한 곳에서 외장하드를 꺼냈다. 요즘 친구들은 굳이 케이블을 찾지 않는다. 클라우드에 로그인만 하면 기억들이 자동으로 떠오르니까. 반면 나는 여전히 서랍을 열고, 엉킨 케이블을 풀고, 포트 앞뒤를 맞춘다. 연결되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생각해보면 이 느린 방식이 나를 가장 닮았다. 직접 만져보고 눈으로 확인해야 안심하는 쪽. 우리는 아마 지나간 세대일 것이다.
외장하드 안에는 수많은 폴더가 있었다. 시간 순서도, 감정 순서도 아닌 애매한 기준으로 나뉜 카테고리들. 그 앞에서 지울 건 지우고 다시 정리하는 내 모습이 조금 우습기도 했다. 감정마저 분류하고 통제하려 드는 건 참 오래된 습관이다.
그 안에는 지웠다고 믿었던 것들이 고스란히 있었다. 아니, 지웠다고 나 자신에게 말해왔던 것들이었다. 여행 사진 몇 장을 보다가 한참을 멈춰 섰다. 그때의 공기, 표정, 걷던 속도 같은 것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설렘은 그렇게 예고 없이 다시 나타났다.
물론 그 자료들이 모두 반갑기만 한 건 아니었다.
자랑하고 싶은 기록만큼이나 부끄러운 흔적도 많았다. 잘 나가던 시절의 자료들, 의미 없이 열심히 모아둔 이력들. 그리고 특히 나를 아프게 했던 파일들이 눈에 띄었다. 누군가와의 다툼을 준비하기 위해 모아둔 문서들, 누군가의 비밀을 들키지 않으려 정리해둔 메모들.
그걸 보며 알았다.
나는 꽤 오랫동안, 꽤 치열하게, 그리고 꽤 아프게 살아왔다는 걸. 잊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냥 닫아두고 있었던 거다. 열지 않으면 없는 것처럼 지낼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들은 언젠가 내가 다시 연결해주길 기다리듯 조용히 쌓여 있었다. 기억은 삭제되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으로 유예될 뿐이었다.
누구에게나 이런 저장소는 하나쯤 있지 않을까. 외장하드일 수도 있고, 사진첩일 수도 있고, 그냥 마음속 깊은 어딘가일 수도 있다. 꺼내기 싫었던 기억부터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들까지 모두 섞인 채로.
특별한 이벤트는 없었다. 그냥 열어봤을 뿐이다.
그런데 그 안에는 수많은 나의 생채기가 들어 있었다. 동시에, 그 상처 덕분에 여기까지 온 흔적들도 분명히 있었다. 삶이 보낸 모든 에러 메시지들이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든 가장 고유한 데이터였다는 걸, 그 서늘한 기계 장치를 만지며 새삼 확인했다.
이 외장하드는 다시 서랍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다음에 언제 다시 꺼내게 될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때는 오늘보다 조금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연결할 수 있기를. 화면 가득 오류 메시지가 뜨더라도, 그 또한 내가 지나온 길임을 긍정하며 웃을 수 있기를. 무엇보다, 무거운 로딩 끝에 아주 오래된 설렘 하나가 먼저 나를 반겨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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