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본래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작은 일에도 마음이 먼저 반응했고, 상황보다 감정이 앞섰다. 문제가 생기면 해결보다 상상이 먼저였고, 그 상상은 대개 최악의 방향으로 흘렀다. 그래서 세상은 늘 조금 과장되어 느껴졌다. 별일 아닌 것도 크게 다가왔고, 사소한 균열이 금방 전체를 흔들었다. 사람들은 그걸 예민하다고 불렀지만, 나는 그냥 그렇게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떠다니는 쪽의 인간.
엠블란스 소리를 처음 의식하게 된 것도 그 무렵이다. 새벽을 가르는 사이렌은 필요 이상으로 마음을 건드렸다. 잠을 깨우는 소리이면서 동시에, 어딘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신호 같았다. 괜히 창밖을 보게 만들고, 알 필요 없는 상상을 불러왔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 소리를 두고 “사람 살리는 소리”라고 말했다. 그 말은 소리를 바꾸지 않았다. 여전히 컸고, 여전히 날카로웠다. 다만 그 이후로 나는 그 소리에 조금 덜 휘둘리게 되었다. 소음이 의미가 되는 순간, 감정의 방향이 바뀌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어릴 적 기억 하나가 겹쳐 떠오른다. 연탄 부뚜막 아래, 수채구멍 옆에 놓인 분홍색 쥐약. 색은 이상할 만큼 예뻤고, 쥐는 조심스럽게 그걸 먹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보며 누군가는 말했다. 쥐는 혼자 먹지 않는다고, 조금 있다가 형제를 부르러 갈 거라고. 지금 생각하면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쥐가 정말 우애가 있어서였는지, 아니면 경계하다가 도망친 건지. 하지만 그날 아이였던 나는 잔인함보다 그 설명을 먼저 받아들였다. 혼자 다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은 그렇게 내 안에 남았다.
중요한 건 그 이야기가 사실이었느냐가 아니다. 엠블란스가 언제나 생명을 살리는 것도 아니고, 쥐가 정말로 형제를 불렀는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위험하고 불편한 장면 앞에서, 세상이 전부 적은 아니라는 해석을 한 번쯤은 먼저 받아봤다는 사실이다. 그 경험은 이후 삶의 어딘가에 남아, 비슷한 순간마다 조용히 작동했다. 눈에 띄지는 않지만, 방향을 바꾸는 힘으로.
사람은 결국 작은 일에 날카로워진다. 특히 돈 앞에서는 더 그렇다. 돈은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요즘의 세계에서는 존엄과 안전과 선택권을 한꺼번에 대표한다. 그래서 돈 이야기는 쉽게 감정으로 번지고, 관계를 빠르게 정리한다. 사랑도, 마음도 숫자 앞에서는 설명을 잃는다. 이 환경에서 긍정적으로 산다는 건, 아무 생각 없이 낙관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매 순간, 날카로워질 수 있는 선택지 앞에서 다른 방향을 고르는 일에 가깝다.
나는 어디에서든 괜히 불평에 편승하지 않으려 애쓴다. 모두가 투덜거릴 때 한 박자 늦추고, 꼭 말해야 할 게 아니라면 입을 다문다. 가족 이야기가 경쟁처럼 흘러갈 때도 마찬가지다. 이건 내가 도덕적으로 우월해서도, 인내심이 특별해서도 아니다. 불평이 삶을 더 단단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걸 알게 된 계기가 거창한 철학이나 대단한 깨달음이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다만 한때, 세상이 덜 무섭게 설명된 적이 있었을 뿐이다.
사랑도 비슷하다. 나이가 들면 사랑을 덜 하게 되는 게 아니라, 사랑의 위험을 더 정확히 알게 된다. 그래서 더 조심해지고, 더 계산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누군가를 좋아하고, 마음을 내어주는 선택을 한다면, 그건 철없음이 아니라 용기에 가깝다. 긍정적으로 사랑한다는 건 상처받지 않을 거라 믿는 게 아니라, 상처를 알면서도 이 감정은 살아볼 만하다고 판단하는 일이다.
나는 여전히 흔들린다. 떠다니는 성질을 완전히 버린 건 아니다. 작은 일에 마음이 먼저 반응하고, 세상이 갑자기 커 보일 때도 많다. 다만 예전처럼 그대로 떠내려가지는 않는다. 무언가가 나를 과하게 밀어낼 때, 나는 다시 예전에 들었던 설명 쪽으로 돌아온다. 엠블란스 소리를 대하던 그 태도, 분홍색 쥐약 앞에서 먼저 건네졌던 말 같은 것들. 그것들은 해결책이 아니라 방향이었다.
긍정은 성격이 아니다. 부유한 환경이 자동으로 만들어주는 태도도 아니다. 긍정은 한 번쯤, 이 세계가 전부 적은 아니라는 설명을 몸으로 받아본 사람에게 남는 흔적에 가깝다. 그 흔적은 삶을 완전히 바꿔주지는 않지만, 무너질 때 어디로 돌아와야 하는지는 알려준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아주 대단하지 않은 하루를 산다. 크게 낙관하지도, 쉽게 절망하지도 않으면서. 이 정도면 괜찮다고 판단하는 기준을 남에게 맡기지 않으면서.
결론은 없다. 대신 나는 안다. 흔들릴 수는 있어도, 완전히 떠내려가지 않는 이유를. 그리고 그 정도면, 이 세계에서 살아가기에 충분하다고.
'수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북극항로 뭐지? (10) | 2026.01.26 |
|---|---|
| 개늑시, 인간의 얼굴 (1) | 2026.01.23 |
| 숨지 않는 사람들 (1) | 2025.12.24 |
| 의사결정은 합리적인가 (2) | 2025.12.18 |
| 말 않던 시간 (0) | 2025.1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