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흘 동안 노트북을 열지 않았다.
금요일에도, 토요일에도 열지 않았다. 일요일이 지나도록 노트북은 책상 위에 접힌 채였다. 핸드폰 속 체크리스트의 날짜도 며칠 전에서 멈춰 있었다.
대단한 일은 아니다. 누군가는 한 달을 그렇게 보내고도 잘 산다. 다만 나는 노트북을 열어야 하루가 시작되는 쪽이다. 전원을 켜는 일은 일을 시작한다는 뜻이면서, 세상에 접속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몇 달 동안 정신없이 움직였다. 사람을 만나고, 전화를 받고, 쓰고, 정리했다. 큰일 하나를 끝내면 작은 일들이 줄을 섰다. 하나를 마치면 다음 일이 이미 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첫날은 쉬었다고 생각했다.
둘째 날에는 오늘까지 해야 할 일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없지는 않았다. 다만 하지 않아도 될 이유가 더 빨리 떠올랐다.
셋째 날이 되자 노트북을 열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열지 않는 일이 자연스러워진 쪽이 더 이상했다.
집 밖에도 나가지 않았다. 핸드폰과 유튜브와 TV와 넷플릭스를 오갔다. 무엇을 보았는지는 남지 않았지만, 시간은 빠짐없이 지나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화면을 보았고, 무엇을 했다고 하기에는 남은 것이 없었다.
사흘은 짧다. 사람이 달라지기에는 짧고, 한쪽으로 기울기에는 충분하다.
나는 나를 부지런한 사람이라고 소개한 적이 없다. 남들이 그렇게 말했고, 나는 굳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다. 부정하지 않는 일도 오래 하면 믿음이 된다.
그 믿음이 사흘 만에 헐거워졌다.
성실함이 사라진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내가 믿어온 나와, 소파에 앉아 화면을 넘기는 나 사이에 틈이 생겼다. 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그 상태에 생각보다 빨리 익숙해진다는 것이 낯설었다.
바쁠 때는 움직이는 쪽이 본래의 나라고 믿었다. 멈추자 멈춘 쪽도 금세 자리를 차지했다.
사람을 끌고 가는 것은 의지보다 반복인지도 모른다. 관성은 부지런한 사람에게만 붙는 훈장도, 게으른 사람에게만 채워지는 족쇄도 아니다. 어제의 나를 오늘로 밀어 보내는 힘일 뿐이다. 방향이 없어서 일을 향해 밀기도 하고, 소파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기도 한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을 틀렸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태어났다고 반드시 무언가를 이루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사람의 삶을 생산량으로 읽는다. 요즘 무엇을 하느냐고 묻고, 무엇을 해냈는지 확인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대답 앞에서는 잠시 말이 끊긴다.
혼자 멈추는 일은 선택일 수 있다. 다만 관계 안에서 한 사람의 멈춤에는 다른 사람의 시간이 붙는다. 한 사람의 침묵이 다른 한 사람의 기다림이 되고, 한 사람의 회피가 상대의 불확실성이 된다. 말하지 않을 자유와 책임지지 않을 자유는 같은 것이 아니다.
나는 일을 맡고도 움직이지 않는 사람을 오래 이해하지 못했다. 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지, 왜 결정적인 순간에 물러서는지 쉽게 물었다.
사흘 동안 노트북을 열지 않은 나를 떠올리자 그 질문이 예전처럼 편하게 나오지 않았다. 밖에서 보면 나도 그냥 하지 않은 사람 중 하나였을 것이다.
사정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핸드폰 체크리스트에도 사정은 적히지 않는다. 밀려서 그랬는지, 그러기로 했는지도 적히지 않는다. 최선이라는 칸도 없다.
했음, 안 했음.
두 칸뿐이다.
'최선을 다했다'는 말은 사실을 보고하는 문장일까, 판결일까.
그 순간을 살아낸 나와, 지금 이렇게 말하는 나는 같은 사람이 아니다. 판결은 언제나 나중에 온 내가 내린다.
나는 남의 결과를 보고 그 사람의 태도를 판단하고, 내 결과 앞에서는 보이지 않는 사정을 길게 설명한다. 그러나 이해한다고 해서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해하되 면제하지 않는 일. 사람 사이에서 가장 필요한 태도이면서, 가장 자주 실패하는 일이다.
나부터 그렇다.
노트북이 닫혀 있는 동안에도 세상은 멀쩡히 돌아갔다. 급한 전화는 거의 오지 않았고, 내가 손대지 않았다고 무언가 무너지지도 않았다.
멈춘 것은 세상이 아니라 나를 확인하는 방식이었다.
아무도 나를 다그치지 않았다. 다그친 건 언제나 나였다.
그 사실이 조금 서운했고, 조금 편했다.
필요한 존재이고 싶으면서도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가는 세상을 원한다. 쉬고 싶으면서도 오래 쉬면 내가 흐려질까 두렵다. 이 모순 중 하나를 없애면 삶은 간단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사람도 함께 납작해질 것이다.
사흘 쉰 일로 오래 멈춰 있는 사람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쓰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이해가 아니라 또 다른 오만일 것이다.
다만 하나는 알게 되었다.
사람은 자신이 비판해온 상태로 생각보다 쉽게 들어간다. 그 문턱은 높지 않았다.
열지 않은 하루가 있었고, 다음 하루가 따라왔다. 오늘 하지 않은 일을 내일로, 내일 하지 않은 일을 모레로 넘겼다. 미뤄진 날들이 서로 기대자 금세 하나의 생활처럼 보였다.
다시 시작하는 일도 그만큼 작았다.
그렇다고 다시 성실한 사람이 된 것은 아니다. 사흘 동안 열지 않았다고 게으른 사람이 된 것도 아니다.
다만 어느 쪽으로든 조금씩 익숙해진다.
사흘 동안 노트북을 열지 않았다.
처음에는 일을 쉰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하면, 나를 믿어온 방식에서 잠시 빠져나와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오늘 노트북을 열었다. 멈춘 체크리스트에 오늘 날짜를 적었다.
다시 일을 시작하기 위해서인지, 다시 나를 확인하기 위해서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울산의 하루'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말이 증거가 되는 관계 (0) | 2026.07.08 |
|---|---|
| 그렇게 깎아서 나아지는 것은 없다 (0) | 2026.06.30 |
| 일이 앞으로 가는 방식 (0) | 2026.05.31 |
| 멸종위기사랑 (0) | 2026.05.23 |
| 출정식 (0) | 2026.05.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