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요일 오후, 하던 일을 셀프 마감하고 잠시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런데 문득 엉뚱한 생각 하나가 들었다. 차에 기름이 얼마나 있지? 그 생각이 왜 거제로 이어졌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거제였다. 늘 메고 다니는 가방에 옷 한 벌을 넣었다. 오후 5시 34분, 집을 나섰다.
거제로 가는 건 정했지만 어디로 갈지는 정하지 않았다. 도착하면 늦은 저녁일 테니 그 지역 음식을 먹고 싶었다. 그래서 고현시장을 목적지로 잡았다. 그렇게 별 준비 없이 시작한 길인데 거제로 들어가는 과정부터 새로웠다. 다리를 건너고 바다 밑을 지나 다시 다리와 터널을 만났다. 거가대로의 가덕해저터널은 바다 밑 암반을 뚫은 것이 아니라 육상에서 만든 구조물을 바닷속에 가라앉혀 연결한 침매터널이다. 알고 나면 지나온 길이 조금 달리 느껴진다.
터널을 빠져나오면 산이 나타나고, 산을 돌아가면 바다가 나왔다. 작은 마을과 섬, 다리가 번갈아 지나가다가 어느 순간 거대한 산업시설이 시야에 들어왔다. 조선소인지 컨테이너 하역장인지 운전하면서는 알 수 없었다. 울산과 닮았는데 달랐다. 울산에서는 산업이 도시의 전면에 있다면, 거제에서는 산과 바다를 다 가진 시골 풍경 사이에서 거대한 산업이 불쑥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거리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외국인들의 모습에 문득 울산 동구가 겹쳐졌다. 실제 거제에서도 조선업을 중심으로 외국인 노동자가 크게 늘고 있다. 두 도시 모두 조선업을 품고 있고, 지금 사람의 구성이 달라지는 큰 전환을 지나고 있다. 여행자의 몇 시간짜리 인상으로 도시를 읽을 수는 없겠지만, 변화는 통계보다 먼저 거리의 얼굴과 말소리로 다가오기도 한다.
장목터널 앞에는 ‘감동의 시작 거제시입니다’라는 문구가 걸려 있었다. 그때는 별 생각 없이 지나쳤다.
고현시장에 도착했을 때 하루는 이미 저물어 있었다. 늦은 저녁을 시장에서 먹겠다는 생각은 도착과 함께 틀어졌다. 대부분의 가게가 문을 닫았다. 깨끗한 이불에서 자고 싶어 근처 거제레지던스호텔에 들어갔고, 편의점에서 도시락과 컵라면, 소주 한 병을 사 왔다.
방에 오븐은 있고 전자레인지는 없었다. 도시락을 다시 들고 편의점으로 내려가 데워왔다. 거제까지 달려와 먹은 첫 끼가 편의점 도시락과 컵라면이었다. 이상하게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애초에 계획대로 되고 말고 할 것이 별로 없는 여행이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면서 조금 이상한 생각을 했다. 누가 내게 미션을 주면 편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오늘 할 일을 정해주고, 나는 그것을 수행하고, 끝나면 누군가 잘했는지 못했는지 평가해주는 삶. 무엇을 할지 매번 스스로 결정하지 않아도 되는 삶은 꽤 편할 것 같았다.
그러다 조금 우스워졌다. 아무도 가라고 하지 않았는데 전날 나는 거제까지 와 있었다. 정해진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정작 아무것도 정하지 않고 집을 나왔다. 굳이 어느 쪽이 진짜 내 마음인지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다. 호텔에서 받은 거제 관광지도를 펼쳤다.
거제 파노라마 케이블카를 타고 산 위로 올라가자 전날 저녁에는 보이지 않던 거제가 한꺼번에 펼쳐졌다. 산은 바다를 향해 내려가고, 바다는 산 사이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섬 뒤에 섬이 있고 그 뒤에 다시 섬이 있었다.
수려하다. 다른 말보다 그 말이 먼저 떠올랐다.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에서 읽었던 통영도 생각났다. 소설 속 통영을 읽으며 머릿속에 만들어두었던 남해의 산과 바다가 눈앞의 풍경과 겹쳤다. 거제와 통영을 지나 남해와 여수로 이어지는 한려해상이라는 이름도 그제야 지명이 아니라 풍경으로 다가왔다. 산과 섬과 바다가 서로의 경계를 조금씩 침범하고 있었다.
한참 사진을 찍었는데 눈으로 본 만큼 핸드폰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려해상을 내려다보며 폰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절경 앞에서 떠올린 생각치고는 지나치게 현실적이었지만, 여행을 왔다고 사람이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산에서 내려와 바람의 언덕으로 향했다. 사진으로 여러 번 보았던 풍차가 서 있었지만 막상 가보니 풍차만큼 그곳으로 들어가던 길이 좋았다. 나무들이 도로 위로 가지를 뻗어 그늘을 만들고, 그 길이 끝날 즈음 바다가 열렸다.
다만 한낮의 거제는 감상만 하고 서 있기에는 뜨거웠다. 해가 머리 위에 올라오자 잠시 서 있는 것도 버거울 만큼 후끈했다. 차로 이동했고, 주차장에서 목적지까지 그리 멀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관광객도 생각보다 많지 않아 줄을 서는 번거로움은 없었다. 한적해서 좋았지만 그 한적함을 오래 누리고 있을 만큼 느긋한 날씨는 아니었다. 아름다운 풍경도 결국 몸으로 본다는 걸 한여름 여행은 금세 알려준다.
근포땅굴에서는 어둠 끝에 바다가 걸려 있었다. 동굴 안쪽에서 바라보면 바깥의 빛이 바다를 한 장의 그림처럼 잘라놓았다. 근처에서 돌문어물회를 먹었다. 전날 저녁이 편의점 도시락이었으니 이제야 처음 생각했던 ‘그 지역의 음식’에 가까워진 셈이다. 시원하고 매웠고, 식당 밖은 여전히 뜨거웠다.
해금강은 보기 좋았다. 그런데 풍경만큼 이름이 오래 남았다. 바다의 금강산, 해금강. 바위와 바다가 만들어놓은 모양을 바라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름을 내어준 곳으로 생각이 건너갔다. 해금강이 이 정도라면 금강산은 얼마나 아름다운 걸까. 거제를 보러 와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금강산을 생각했다. 여행은 도착한 곳에서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을 꺼내놓기도 한다.
돌아오는 길에는 거제휴게소 전망대에 올랐다. 가까이 밭이 있고 그 너머로 바다가 펼쳐졌다. 바다에는 섬이 떠 있고, 섬과 섬 사이에는 긴 다리가 걸려 있었다. 산과 밭, 작은 마을과 바다, 섬과 다리. 그 사이 어딘가에는 거대한 조선산업이 있고 낯선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살아간다. 산업도시라고만 하기에는 수려하고, 관광지라고만 하기에는 삶의 덩치가 컸다. 거제는 그 둘을 한 풍경 안에 품고 있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출발하고 거의 24시간이 지난 지금, 다시 내 자리에 앉아 있다. 삶에 미션이 생긴 것도 아니고 무엇을 해야 할지 더 분명해진 것도 없다. 그런 것을 얻으려고 떠난 여행도 아니었다.
어제 이 시간에는 거제가 없었다. 하던 일을 셀프 마감하고 몸을 뉘었다가 차에 기름이 얼마나 있는지 궁금해졌을 뿐이다. 그 뒤로 고현의 닫힌 시장과 편의점 저녁, 아침의 바다와 섬, 한낮의 열기, 해금강과 돌문어물회가 생겼다.
지금 지도를 펼쳐놓으면 어제와 똑같은 지도인데, 내게는 그렇지 않다.
지도에 점 하나를 찍은 기분이다.
그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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