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에서
무릎까지 차오른 습기 없는 눈에 해가 비치면 세상이 애니메이션처럼 보인다. 한 뼘 간격으로 보석 같은 결정이 반짝거리고, 그 반짝임이 눈앞 공기에서도 느껴진다. 눈은 땅에만 쌓여 있는 게 아니라, 시선과 숨 사이에도 떠 있다. 시선을 조금 멀리 보내면 반사된 햇살에 새하얀 언덕이 드러나고, 어린 시절 TV 속에서만 보던 뽀로로 마을에 와 있음을 그제야 알게 된다. 현실인데, 기억처럼 보인다.
밟아본다. 교과서처럼 뽀드득 거린다. 발을 떼고 다시 내린다. 뽀드득. 같은 자리에 다시 발을 올려도 소리는 늘 조금씩 다르다. 눈이 계속 내리는 중인데도 발바닥 아래에서는 매번 새로운 저항이 느껴진다. 눌린 눈과 눌리지 않은 눈이 층을 만들고, 그 위에 내가 한 장 더 얹힌다. 눈 벽에 파묻혀 넓었던 길도 한 사람 다닐 만큼, 딱 그만큼만 남는다. 다른 길은 없다. 제각각 깊이의 건반처럼 밟히는 눈이 있고, 그 소리를 듣는 내가 있다.
눈이 멈춘 밤이나 새벽에는 무섭다. 풍경은 그대로인데, 온도가 달라진다. 주머니에 손을 넣을 수 없다. 균형을 잡아야 한다. 나만 뒤뚱거리고 현지인들은 미끄러지듯 잘도 걷는다. 익숙함의 차이가 이렇게 크게 보일 줄 몰랐다. 캐리어가 가는 길은 여행자의 흔적을 남긴다. 바퀴 자국이 길게 이어지고, 나는 그 뒤를 따라간다. 눈 위에서는 누구도 오래 숨길 수 없다.
함박눈이 내린다. 바람이 거의 없어 눈은 흩어지지 않고, 이쁘게, 그리고 밀도 있게 촘촘히 내린다. 떨어지는 속도가 보일 만큼 느리다. 도심의 일루미네이션과 어울리자 장면이 된다. 뭔가 스토리가 만들어질 것 같고, 그 새로움이 나에게 일어날 것 같다. 그 속으로 들어간다. 영상을 찍으며 걸어본다. 하지 않던 행동이지만 오늘은 자연스럽다. 기록보다는 흔적에 가깝다. 이름을 불러보고 싶고, 함께 오자 말하고 싶다. 말은 공기 속에서 멈추고, 눈만 계속 쌓인다. 눈사람이 되어가는 나를, 이 시간의 나를,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어진다.
눈이 이렇게 다양하다는 것을 왜 이제 알았을까. 보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보는 눈으로 시작된 나의 여행은 밟는 눈으로 옮겨가고, 맞는 눈에서 완성되며 마무리됐다. 미끄러져 넘어진 기억과 항공 기내 대기 2시간 이슈까지 포함해서. 돌아보면 그마저도 눈처럼 쌓인다. 젖은 외투가 마르기 전까지, 몇 장면은 쉽게 녹지 않는다.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오키나와 沖縄 (2) | 2024.06.01 |
|---|---|
| 후쿠오카1 (2022. 12.) (52) | 2023.10.21 |
| 가을 들녘이 아름다운 안동 물돌이 마을 (60) | 2023.10.12 |
| 땅과 사람의 이야기 토지, 하동 (102) | 2023.09.25 |
|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29) | 2023.09.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