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불산 억새평원을 걸어 보겠다고 작정하고 나선 날, 내가 가장 오래 들여다본 것은 억새가 아니라 주차할 자리였다.
주차장 두 곳이 모두 가득했다. 올라가는 길에도 차가 줄지어 있었고, 내려오는 길도 사정은 같았다. 한 자리라도 비면 세울 생각이었지만 그런 자리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새벽에 출발해야 하나.
가을이면 능선마다 억새가 펼쳐진다는 신불산. 억새를 보러 온 사람이 많다는 건 알았지만 그들이 타고 온 자동차까지 헤아리게 될 줄은 몰랐다.
결국 차를 돌렸다.
집으로 가기엔 아쉬웠다. 억새를 보려고 나선 길인데 아직 한 포기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때 태화강의 억새밭이 떠올랐다. 명촌억새군락지. 이름은 알아도 가 본 적은 없는 곳이었다.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했다.
도착해서도 억새밭으로 드는 길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안내하는 곳은 맞는 것 같은데 입구가 어디인지 알 수 없어, 주변을 살피다 다리 아래에 차를 세웠다.
억새 한번 보자고 이만한 수고는 치러야 하는 모양이었다.
걸어 들어가니 억새가 생각보다 높았다.
내 키를 넘는 줄기들이 빽빽하게 서 있었다. 멀리 은빛으로 펼쳐진 평원을 기대했는데, 눈앞에는 다른 억새를 가리는 억새뿐이었다. 어디까지 이어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산에서는 차에 가로막히더니 강가에서는 억새에 가로막혔다.
길가에 뱀을 조심하라는 팻말이 서 있었다.
그런 안내문은 읽기 전보다 읽은 뒤가 조금 불편하다.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게 좋았다.
조금 전까지 차들 사이에서 빈자리를 찾던 내게, 여기는 누가 나타날 기미조차 없었다. 길은 조용했고 억새는 길을 따라 서 있었다.
얼마쯤 들어가니 억새 사이로 데크가 놓여 있었다.
흙길 대신 무릎 높이쯤 떠 있는 길. 그 구간만 따로 꾸며 놓은 듯했다.
올라섰다.
발아래 길이 내려앉고, 머리 위에서 흔들리던 이삭이 눈높이로 내려왔다. 몇 걸음 더 옮기자 그 뒤에 숨어 있던 억새가 드러났다.
그 뒤에도 있었다.
줄기 사이에서는 알 수 없던 넓이가 갑자기 생겼다. 억새가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고 송전탑이 서 있었다. 구름이 하늘의 절반쯤을 차지했다. 조금 전까지 억새 사이를 걷고 있었는데, 이제는 억새가 차지한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바람이 지나갔다.
가까운 이삭들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멀리 있는 억새도 뒤따라 움직였다. 모두 같은 방향으로 눕는가 싶더니 조금씩 다른 쪽으로 돌아왔다.
하나하나는 제멋대로였다. 그런데 멀리서 보면 서로의 움직임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흰 꽃이삭들이 연달아 방향을 바꾸면서 넓은 억새밭에 결을 만들었다.
바람이 지나가는 범위가 눈에 들어왔다.
사진을 찍다가 영상을 켰다.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순천만에서 보았던 갈대밭이 떠올랐다.
억새는 산에서 자라고 갈대는 물가에서 자란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는 강가의 억새밭이다. 이름을 잘못 붙인 건가 싶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물억새라는 것이 있었다. 억새와 가까운 종류이면서 강가의 젖은 땅에서도 자라는 식물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다 가로등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밤에는 무섭겠다. 같은 이유로.
이쯤이면 됐다 싶었다.
데크를 내려오자 억새는 다시 내 키보다 높아졌다. 조금 전까지 펼쳐져 있던 풍경은 줄기들 뒤로 사라졌다.
다리 아래 세워둔 차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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