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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학교를 묻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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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4월 23일자 「조선인학교에 관한 분쟁 경과 개요」. 일본 국립공문서관 소장.

 

1948년 1월 24일, 일본 문부성 학교교육국장이 각 지방정부에 통달 한 장을 보냈다.

 

제목은 「조선인 설립 학교의 취급에 대하여」

 

조선인 자녀들도 일본의 교육법령에 따른 학교에 다녀야 하며, 조선인이 세운 학교 역시 정해진 기준에 따라 인가를 받아야 한다는 내용.

 

학교의 법적 지위를 정하는 행정문서였지만, 그해 봄 오사카와 고베에서는 이 문제로 수많은 사람이 거리로 나왔다. 통달에 따르지 않는 학교들에 폐쇄 명령이 내려지면서 갈등이 커진 것이다.

 

학교 하나를 두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야기는 그보다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과 함께 조선은 해방을 맞았다. 일본에 살던 조선인 가운데 상당수는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수십만 명은 그곳에 남았다.

 

일본으로 건너간 사정부터 서로 달랐다. 일자리를 찾거나 공부하기 위해 떠난 사람, 가족을 따라 이주한 사람도 있었다. 식민지의 가난과 불평등은 사람들을 일본으로 향하게 했고, 전쟁이 길어지면서 강제동원까지 이어졌다.

 

돌아가는 일이라고 쉬웠을까.

 

일본에서 가정을 꾸리고 생활의 터전을 마련한 사람들, 귀환할 여비나 고향에서 다시 살아갈 기반이 마땅치 않은 이들. 일본에서 태어나 조선 땅을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아이들도 있었다.

 

해방됐으니 고향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라는 말로는 다 담기지 않는 사정이다.

 

남은 사람들은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국어강습소였다. 식민지 시절 제대로 배우지 못했던 조선말과 글을 익히고, 언젠가 돌아갈 날을 준비하는 곳. 일본에서 계속 살아갈 아이들에게도 부모의 말과 역사는 필요했을 터였다.

 

1945년 결성된 재일본조선인연맹, 조련이 이러한 움직임을 조직적으로 뒷받침하면서 강습소는 학교로 발전했다. 교육과 정치활동을 함께 벌이던 조련의 영향 아래 민족교육은 빠르게 확산됐고, 1947년에는 조련계 초등교육시설만 500곳을 넘어섰다.

 

그때 한반도에는 아직 두 정부가 없었다.

 

대한민국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수립되기 전, 일본에 남은 조선인들이 학교부터 세운 것이다.

 

학교를 만든 사람들의 정치적 생각까지 모두 같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오늘의 남북한 구분을 그 시절에 그대로 가져다 놓기에는 시간의 순서부터 맞지 않는다.

 

당시는 연합군 점령기였다. 일본 정부는 전후 교육제도를 정비하고 있었으며, 조선인학교에도 일본의 법률을 적용하려 했다. 반면 조선인들은 민족교육의 자율성을 요구했다.

 

냉전이 시작되면서 정치적 문제도 겹쳤다. 좌파 정치운동과 관계가 깊었던 조련을 점령당국이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인들에게는 자녀들의 말과 역사를 가르칠 학교가 걸려 있었고, 일본 당국은 교육행정과 치안의 문제로 접근했다.

 

1948년 4월, 오사카와 고베에서 학교 폐쇄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일부 참가자들이 관공서에 진입하고 시설을 훼손하면서 충돌이 커졌고, 경찰과 점령당국은 강경하게 대응했다.

 

4월 26일, 오사카에서 경찰이 발포했고 열여섯 김태일이 총에 맞아 숨졌다.

한신교육투쟁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시위 과정의 위법행위와 학교 폐쇄정책의 정당성, 경찰의 대응은 각각 살펴야 할 문제다. 당시의 치안 상황과 조련의 정치활동도 빼놓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학교를 둘러싼 충돌에서 소년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충돌 이후 일본 당국과 조선인 단체 사이에는 협상이 이어졌다. 5월 초 문부대신과 조선인교육대책위원회가 각서를 교환했다. 일본의 교육법령을 따르되, 사립학교에 인정되는 자율성 안에서 조선인 고유의 교육을 할 수 있다는 취지였다.

 

지역에 따라 학교 운영을 이어갈 길도 열렸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1949년 9월 조련이 해산된 데 이어, 10월에는 조련계 학교들을 대상으로 대규모 폐쇄 조치가 다시 시행됐다. 학생들은 일본 공립학교로 옮기거나 다른 형태의 교육시설을 찾아야 했다.

 

한반도에서는 이미 남과 북에 각각 정부가 들어서 있었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일본은 미군의 후방기지가 됐다. 병력과 군수물자가 일본을 거쳐 한반도로 향했고, 전쟁 특수는 일본 경제의 회복을 앞당겼다. 공산주의 세력의 활동과 국내 치안에 대한 일본 정부의 경계도 한층 높아졌다.

 

재일조선인 사회 역시 전쟁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1946년 결성된 민단은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조직으로 발전했고, 북한을 지지하는 세력도 독자적인 기반을 넓혀갔다. 한반도의 분단이 일본에 사는 동포들 사이에도 정치적 경계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 경계 밖에서 생업에 종사하고 가족의 일상을 이어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1952년에는 법적 지위마저 달라졌다.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되자 일본 정부는 조선인과 대만인이 일본 국적을 상실한 것으로 처리했다.

 

이미 1947년 외국인등록령에 따라 등록 업무에서는 외국인으로 간주되고 있었지만, 법적 국적을 상실한 것은 강화조약 발효 이후였다. 일본에서 태어났거나 수십 년을 살아온 사람들도 예외는 없었다. 국적을 선택할 기회 역시 주어지지 않았다.

 

이후 체류와 권리에 관한 제도는 여러 차례 바뀌었다. 1991년 특별영주자 제도가 마련되면서 오랜 기간 일본에 거주한 재일동포와 그 후손들의 법적 지위도 한층 안정됐다.

 

그러나 국적과 체류자격을 정하는 일로 사람들의 소속감까지 정리할 수는 없었다.

 

1955년, 북한을 지지하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조총련이 결성됐다.

 

상당수 조선학교가 조총련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고, 민족교육은 조총련의 주요 사업으로 자리 잡았다. 1957년부터는 북한의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이 보내졌으며, 당시 교과서와 교육과정에도 북한의 정치적 이념이 반영됐다.

 

북한과의 관계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2026년 4월 북한은 조총련에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으로 3억 1,636만 엔을 보냈다고 발표했다. 개별 학교에 실제로 얼마가 전달됐고 어떻게 사용됐는지는 별도로 확인할 문제지만, 북한의 교육지원이 과거의 일로 끝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조선학교는 북한 학교일까.

 

조총련과 북한에 깊이 연결돼 발전해 온 민족교육기관이라는 설명은 가능하다. 그러나 학교가 맺어 온 조직적 관계를 학생 한 사람의 국적이나 생각에 그대로 옮겨 놓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조선학교에는 대한민국 국적의 학생도 다닐 수 있다. 일본 국적을 취득한 재일동포도 있으며, '조선적'이라는 표기를 유지하는 사람들도 있다.

 

조선적은 북한 국적을 뜻하지 않는다. 일본의 외국인등록에서 한반도 출신을 나타내던 행정상의 지역 표기로, 일본 정부 역시 이를 북한 국적과 구분하고 있다.

 

국적은 서류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어느 곳에 속한 사람인지, 어떤 공동체를 자신의 뿌리로 생각하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2020년 발표된 한 연구는 조총련과 관계를 맺고 조총련계 학교에서 교육받은 재일조선인 37명을 심층 면담했다. 조사는 2007년부터 2010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연구에서 주목한 것은 이들의 소속감이었다. 북한이나 조총련에 대한 정치적 충성보다 학교와 지역 공동체에서 형성된 유대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고, 일본 사회의 일원이라는 인식을 함께 지닌 사람들도 있었다.

 

특정 집단을 대상으로 오래전에 진행된 연구인 만큼 오늘날의 학생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다. 다만 학교의 조직적 관계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체성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살펴볼 만하다.

 

재일동포의 민족교육도 조총련계 학교에만 머물지 않았다. 한국계 민족학교가 별도로 발전했고, 일본 공립학교 안에서도 조선인의 언어와 문화를 가르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조선학교를 둘러싼 갈등은 이후 새로운 형태로 나타났다.

 

2010년 일본에서 고교 수업료 지원제도가 도입되면서 조선고급학교를 대상에 포함할 것인지가 쟁점으로 떠올랐다.

 

일본 정부는 학교 운영의 적정성을 충분히 확인하기 어렵고 조총련의 영향도 우려된다는 입장이었다. 학교 측과 지원단체들은 정치적 관계를 이유로 학생들의 교육비 지원을 제한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맞섰다.

 

2013년 문부과학성은 조선고급학교를 개별 지정할 수 있었던 근거 규정을 삭제했다.

 

오사카에서는 지방정부의 자체 보조금을 둘러싼 갈등도 벌어졌다. 오사카부는 재정정보 공개와 특정 정치단체로부터의 독립성 등을 지원 조건으로 내세웠다. 2010년도에는 고급학교를 제외한 초·중급학교에 보조금을 지급했으나, 2011년도에는 조선학교 전체에 지급하지 않았다.

 

학교 측이 국가와 오사카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은 최종적으로 패소했다. 법원은 행정처분의 적법성을 판단했지만, 일본의 일부 시민단체와 변호사들은 이후에도 교육지원의 형평성을 문제 삼았다.

 

학교 운영의 투명성과 법적 기준을 강조하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학생의 교육받을 권리를 정치적 판단과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도 이어졌다.

 

2026년 4월, 일본의 고교 수업료 지원제도가 다시 바뀌었다.

 

소득 제한을 폐지하고 외국인학교에 대한 기존 지정제도도 없앴다. 종전에 지정된 외국인학교 학생들에게는 경과조치와 별도의 지원사업이 마련됐지만, 기존 제도에서 지정받지 못한 조선고급학교의 국가 지원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1948년의 학교 폐쇄와 오늘날의 교육비 지원 문제는 같은 사건이 아니다. 적용되는 법률도, 재일동포의 사회적 지위도 크게 달라졌다. 그러나 민족교육의 자율성과 학교의 정치적 관계를 공적 지원에서 어떻게 판단할 것인지를 둘러싼 논쟁은 형태를 바꿔 계속되고 있다.

 

최근에는 북한의 정책 변화까지 더해졌다.

 

북한은 2023년 말부터 남북관계를 적대적인 두 국가의 관계로 규정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꾸었다. 통일을 중요한 가치로 다뤄 온 조선학교에도 이전과는 다른 상황이 놓였다.

 

분단 이전에 시작된 민족교육이 분단 이후 북한과 깊은 관계를 맺었고, 이제는 북한의 통일정책 변화까지 마주하고 있다. 그 변화가 실제 교육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는지는 학교마다 따로 살펴야 할 일이다.

 

그사이 학교도 달라졌고, 그곳에서 공부하는 세대도 바뀌었다.

 

학교가 지나온 역사는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지만, 지금의 조선학교를 그 역사 속 한 시점에만 놓아둘 수는 없다.

 

1948년 문부성의 통달에는 '취급'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그보다 먼저,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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