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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

도피라도 좋다. 여행.

저마다 여행을 가는 목적이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새로운 시작을 위해, 누군가는 도망치듯, 누군가는 아무런 목적도 없이.

환경도 다르다. 휴일을 모으고 모아가야 하는 직장인, 최저가를 미리 찾아 예약 후 일상을 지내다 떠나는 이들, 그냥 자유로운 영혼들.

 

내가 어릴 땐 텐트 치고 피서를 가거나 방학 때 시골의 친척집 정도는 방문해도 여행을 떠나는 집은 적었다. 최소한 내 주변은 그랬다.

그래서 내 여행의 시작은 촌스러운 수학여행이다. 교육과정으로 학교 밖 사회에 대한 경험과 관찰 차원이 목적이었겠지만 나에게 수학여행은 벚꽃이 흐드러진 나무 아래 어찌하면 불량스러운 장난질을 해볼까 하는 또래들의 추억이다.

그리고 다음 여행은 지친 일상을 달래는 휴양 패키지.

역시 여행도 경험자가 하는 거라고, 그저 일상에서 벗어나 식사, 숙박, 수영장, 놀이시설이 갖추어진 곳에서 쉬는게 최고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일정을 정하지 않고 떠난 여행은 사업차 머물렀던 중국이 처음이다. 워낙 공산국가에 대한 주변의 으름장이 있어서 대륙을 횡단하는 대대적인 여행은 확실히 아니었고, 시간이 많이 흘렸다는 핑계를 대기에는 별 기억이 없는 걸 보니 스스로도 여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중국은 시간이 지날수록 한 가지 이상한 점과 아흔아홉 가지 이해되지 않는 점이 점점 오버랩되어 그리 좋은 기억은 없다. 당시엔 다른 문화를 이해하려는 의지도 적었고, 중국을 후진국으로 바라보는 잘못된 편견도 있었다.

 

여행이 뭘까?

여행이라는 참 이상한 일에는 그 이상한 여행이라는 행위를 우리가 해야 하는 이유가 담겨있다. 여행 속에서 우리는 나를 아는 이가 없는 낯선 공간에서 새로운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더해져 나 자신이 되었다는 사실도. 외면하고 싶었던 나의 모습을 속속들이 알게 되는 일은 괴롭지만 꼭 필요한 일이다. 틀에 박힌 일상에서 벗어나 스스로 하루 일과를 정해야 할 때, 비로소 진짜 나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나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끊임없이 여행을 떠나야 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또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그 어떤 여행과도 닮지 않은 여행. 남들 다 가는 관광지가 아닌 자기만의 경험.

숙소를 예약하고 비행기 티켓을 끊고 정해진 목적지 없이 떠난 자유여행 경험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제 나의 여행은 큰 관광지보다 작은 삶을 궁금해하며 내적 세계를 넓혀가는 나의 이야기이다.

대단하지도 않고,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이 여행의 작가인양 낯선 것들 속에서 낯선 자신과 나누는 대화. 낯선 감각을 얻고 계속 발걸음을 옮겨 또 다른 어디론가 향하는 나.

우리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사람이 살아가는 여행지의 본모습에 가까이 다가서게 된다.

나만의 여행 목적과 취향이 만들어진다.

 

여행이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무언가를 얻어오는 것은 사실이다. 맛있는 것, 넓은 세상, 내면의 목소리, 잊고 있었던 것 좋았다 나빴다 희비를 오가는 삶 속에서 잠시 익숙한 것들을 떠나 오로지 나에게 집중하며 한숨 돌리는 기분.

 

일상으로 돌아오면 여행지에서의 시간은 금세 잊혀지고 만다. 그대로 무뎌진 채 지내다 여행에서 느꼈던 나의 모습이 모두 소진될 때쯤 다시 짐을 싸고 떠나기를 바란다. 여행의 순간은 금세 사라지지만 기록은 오래 남는다. 그렇게 시작하고 끝이 나고 다시 시작하고.

 

내가 떠난 여행들은 확실하게 나의 삶을 지탱하는 잔 근육들을 만들어 주었다.

 

가장 좋을 때 떠나는 것이 여행이고, 가장 힘들고 괴로울 때도 여행을 떠난다. 배낭에 무엇을 담아 올지는 여행자의 몫이다.

여행이 도피라도 좋다.

나의 방황의 점들이 쌓이고 연결되어 새로운 기회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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