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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

부모신화

아이에게 부모란 신과 같은 존재이다.

나를 존재하게 해 주었고, 나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는 존재.

일정 기간 돌봄이 필요한 어린 시절이 있는 동물은 동글동글 귀엽게 생기거나 애처로운 울음소리로 부모를 자극하는 방향으로 진화를 했고, 어린 시절이 그 누구보다 긴 인간은 모성본능이니 가장의 책임감이니 하는 문화까지도 더해서 개체를 이어왔다.

 

어릴 때는 부모에 대해 한 치 의심이 없었다. 우리 부모님은 다소 엄격하시다라던가, 감정적이다라는 불만은 있었지만,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고 나를 위해서 삶을 희생하고 있다는 명제는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자기함정에 빠져서 형제들과 관심을 경쟁하며 부모님께 인정을 받으려 하고, 사랑을 받으려고 했다.

학교에서도 책과 TV에서도 내가 아프면 밤새 간호를 하는 어머니의 희생이라던가, 어버이날 종이 카네이션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며 더 힘을 내서 일하시는 아버지라던가, 오늘 이 힘든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가족이라던가 하는 희생과 효를 양쪽에 요구하는 문화가 당연했고, 다른 집의 상황을 알 수 없는 나는 어른들은, 우리 부모님은 그렇게 참고 희생하며 나를 키우는 줄 알았다. 사랑하니까.

 

막 어른이 된 청년기에도 상대적으로 어른인 선배와 상사에 대한 신화가 이어졌다.

저렇게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야, 다 나를 가르치려고... 공동체를 위해서... 미래를 위해서...’ 라며 어른들의 말 이면의 깊은 뜻을 이해하려고 했고, 배우려고 했다.

 

나의 부모신화가 깨진 것은 내가 사회에서 선배의 자리에 서고 나서이다.

내가 알아 왔던 신화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해서 의문을 느꼈다.

내가 비정상인가?

 

내가 이 자리에 서 보니 어른이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깨닫고 애써 감추게 된다.

우리 부모님도 당시 어른들도 지금 내 주변의 일반인일 뿐이란 걸 깨닫게 되었다.

아주 어린아이보다는 당연히 지식도 경험도 책임감도 있겠지만.

사실 엄청난 신적 존재는 아니다.

그분들도 당시 하루를, 일상을, 현재를, 열심히 살아가는 젊은 아버지, 어머니였을 뿐.

 

그저 나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어릴 적 상처가 조금 아문다.

가족이 내 생일을 잊었을 때의 섭섭함이

나만 남겨진 듯한 소외감이

형제들과 차별받는다고 느껴졌던 아픔이

 

나와 같은 곳에 서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부당함이 이해된다.

나를 콕 찍어 지적했던 선배의 질투가

일단 넘어가자던 윗선의 다급함이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았던 상사의 부족함이

 

태어나려는 자는 알을 깨야 한다.

절대적 부모 신화에서 너무 늦게 깨어났지만

알을 깨고 내 발로 우뚝 서 내 눈으로 바라보니

이제야 비로소 인정받으려는 바둥거림이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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