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국가의 산업의 구조와 규모는 각기 다르다.
그러나 90년대 말 경제활동의 글로벌화가 시작되면서 국가 간 상호 의존도가 거미줄처럼 얽히고설켜 내수로 국내 경제 사이클을 이끌어 갈 수 있는 나라들도 영구히 독자적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일본은 그들도 우리도 함께 피해를 입는 방법을 선택했다.
망조의 길을 알면서도 가는 걸까?
2차 세계대전 말미 미국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가 연구한 책 ‘국화와 칼’에서 한 발짝도 달라지지 않은 일본의 모습에 의구심이 든다.
‘국화와 칼’을 읽고 가장 이질적으로 느껴졌던 일본의 모습은,
타인의 시선을 가르치는 엄마의 육아법이었다.
타인에게 피해가 되니 무례해서는 안된다 보다는 타인에게 무례하면 그들이 너를 이상하게 생각하니 무례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는 일본인 특유의 도덕성이 죄를 반성하지 않고 그런 일이 없었다고 왜곡하는 지금을 만든 게 아닐까?
국민들에게 알리지 않고 증거가 있어도 없는 척, 하지 않은 척.
난징대학살도 그런 일이 없었고, 조선의 식민지 지배도 그들에게 도움이 되었고, 위안부도 스스로가 원해서 따라왔다는 자료와 증인과 역사를 애써 못 본 척 왜곡하는 일본사회.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마지막 그 순간까지 결사항전을 외치던 가미카제와 패전 후 미 군정이 들어왔을 때 폭동 없이 환영의 성조기를 흔드는 모습에서.
적군과 싸우던 정부가 그대로 성조기를 흔들더니 그 정부가 그대로 살아남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들의 결벽은 죄를 짓지 않는 게 아니라 죄를 없던 일로 만드는 것인가?
미국에 의해 되살아났다가, 미국의 푸들이 되어 이용당하는 일본
충성스러운 내수 시장은 부럽지만 나란히 푸들이 되고 싶지는 않아 괴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