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부츠 다레다‘
동일한 시간대가 각기 다른 시선으로 구성되어 있는 영화는 사카모토 유지의 각본으로 합을 맞추어 한 씬 한 씬 찍었다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연출의 힘이 보여진다.
첫 번째 엄마 사오리는 홀로 아들을 키우며 직장 생활을 하는 가장이다. 세 가지 시선에 동일한 시간을 부여했다면 엄마 사오리의 시간은 빠르다. 아들을 포함한 가정과 일이 전부이다. 새로움이 없다. 학교의 항의 방문도 해결해야 하는 일의 연장이다. 아들 미나토를 사랑하지만 내면을 보려 하지 않고 겉돈다. 우리의 가정이다.
두 번째 선생님 호리는 엄마 사오리와 같이 한 부모 가정이지만 사회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게 자랐다. “남자답게”라는 말을 의식 없이 뱉어내지만 유일하게 책임감을 가진 어른이고 일본의 사회적 시스템의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우리의 사회이다.
세 번째 미나토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아이다. 정답이 없지만 사회적으로 저기 선 넘어 있는 같은 남자인 요리를 좋아하면서 혼란을 느낀다. 폐전철 속 둘만의 공간에서 놀이는 정해진 사회 밖의 모습과 그 속에서 출발시키려는 기차는 아이들이 가고자 하는 길로 느껴진다. 여기서 시간은 매 순간이 새롭고 창작의 활동으로 여유롭고 아름답다.
영화의 각 시선은 인위적인 화재(인재)에서 시작하고 사회적으로 막을 수 없어 피할 수밖에 없는 자연재해(태풍)로 끝이 난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세상과 그 세상에서 벗어나 있는 아이들.
진실의 중요성보다 빠른 해결책을 찾고, 한 사람의 희생으로 조직을 살리는 사회적 시스템.
작은 재난, 태풍의 재난 역시 막지 못하는 국가와 사회. 아이들에게 손 내밀지 못하는 국가와 사회.
평범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사회가 만든 틀이 폭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이고 사회로부터 버려진 장소는 아이들에게 안식처가 되었을 것이다.
마지막 미나토의 시선에서 태풍이 끝난 후 아이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첫 번째, 두 번째와 달라 새로운 구성처럼 느껴지기도 한 이 장면은 오직 아이들 뿐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 아이들을 보고 있는 내가 느껴진다.
바뀌지 않는 세상에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세상을 선물하고 싶어졌다.
호리 선생님의 어항 속의 금붕어처럼 사회적 시스템, 돌봄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아이들이 마지막 장면처럼 환하게 웃을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만들어 주기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이 있겠지만 동일 사건 100명의 100가지 시선과 관객에게 선택적으로 주어지는 메시지는 너무나 괴로우면서도 즐겁다.
괴물은 누구일까? 아니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