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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

시간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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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19년 전 간이식수술을 받으셨다. 그때의 회복은 가족 모두에게 기적처럼 느껴졌지만, 시간이 흐르며 파킨슨병이 찾아왔고, 최근 들어 신장까지 온몸이 조금씩 더 불편해졌다. 이제는 작은 동작조차 온 힘을 다해야 한다. 움직임이 둔해지고 균형이 흐려지며,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존엄까지 겹쳐 고통스러워하신다. 이런 현실을 보는 일은 가족에게도 나에게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간경화로 시작된 아픔, 30년간 한 움큼의 약을 먹는 것도 지겹다고, 잦아진 응급 상황과 예상되는 앞날이 더 이상 의미 없다고 판단하신 아버지는 말을 더듬거리면서도 단호하게 본인의 의지를 말씀하신다. 그때 아버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은 체념이 아니라 마지막 남은 선택권을 지키려는 간절함 같았다. 삶이란 것이 결국 시작과 끝 모두 타인의 기억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 것인지, 갑작스러운 죽음이든 준비된 죽음이든 타인에겐 어쩌다 갑자기 맞는 죽음일 뿐인지 생각하게 된다.

 

대학병원에서는 재활이나 요양병원으로의 전원을 권한다. 집으로 갈 수는 없다고 한다. 그것이 의료적으로 안전하고 돌봄을 받기 좋다는 설명은 이해하지만, 아버지의 입장은 분명하다. "나는 집으로 가서 내 방식으로 마무리하고 싶다." 낯선 환경에서의 치료 또는 연명의 연속이 아닌, 익숙한 의자와 창가의 햇빛 속에서 마지막을 맞고 싶어 하신다.

 

병원의 권유대로 하면 돌봄의 부담이 줄어들고 위급 상황에 더 잘 대응할 수 있다. 반면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은 불안과 책임을 수반한다. 나는 설득과 반박을 늘어놓는다. 당연히 병원의 논리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버지의 '자기 의지'라는 사실 앞에서 마음이 흔들린다.

 

결국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재활병원으로 이동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어디로 가실지 모른다. 자식인 내가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안전과 돌봄을 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 판단 앞에서.

 

그런 아버지를 보며, 언젠가는 자신의 삶을 얼마나 의미 있게 살았는가를 안아들 순간이 올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나 같은 사람이 판단할 몫이 아니다.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연장의 양이 아니라 어떻게 시간을 채우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어렴풋 알겠다.

 

아버지는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분노나 절망보다는 조용한 수용이 표정에 스며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나는 죄책감과 무력감, 그리고 놓아드려야 한다는 막막함이 뒤엉킨 채로 서 있다. 이것이 옳은 선택인지 확신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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