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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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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에는 두 개의 얼굴이 있다. 하나는 나를 향한 책임이고, 다른 하나는 타인을 향한 책임이다. 같은 말처럼 보이지만, 두 책임의 무게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내 어깨를 짓누른다.

 

나를 향한 책임은 주어진 역할을 완수하는 것이다.

구성원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할 때, 나는 벌레처럼 작아진다. 자괴감이 온몸을 감싼다. 반대로 그 구성을 다하면 비로소 인간 구실을 한 것 같은 안도가 찾아온다. 두려움이 책임감과 맞물리면 일의 시작이 망설여진다. 막상 시작하면 잘 해내지만, 그 전에 머릿속으로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며 에너지를 양껏 쓴다. 책임을 완수하지 못하면 존재 자체가 무력해지는 것만 같다. 남이 책임감 없이 행동할 때는 '왜 그렇게 책임감이 없어.' 한마디 던지고 말 수 있지만, 내가 그러면 견딜 수 없다. 나에게 책임감은 너무 무거운 단어다. 역할의 완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절대적 명제다.

 

타인과의 책임은 또 다르다. 그것은 약속을 지키는 일이다.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 나눈 이들과의 약속은 나 홀로 짊어지는 책임과는 다른 결을 지닌다. 그리고 훨씬 어렵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관계의 책임을 진다. 어떤 이는 관계가 흔들릴 때 더 단단히 붙잡으려 애쓴다. 상담실을 찾고, 대화를 시도하고, 변화를 약속한다. 또 어떤 이는 조용히 거리를 둔다.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혹은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 물러선다. 또 다른 이는 현실을 외면한 채 도파민을 좇으며 오늘만 사는 관계로 전락시킨다. 직면하기엔 너무 아프니까, 잠시라도 잊고 싶으니까.

 

어떤 관계에 있든, 또 그 관계가 정리되었든,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책임을 진다. 때로는 견디는 것으로, 때로는 떠나는 것으로, 때로는 외면하는 것으로. 그 어느 것도 쉽지 않고, 그 어느 것도 온전히 옳다 말할 수 없다.

 

나는 평온하고 단순하게 보노보노처럼 살 수 없는 사람이다. 바람에 무수히 흔들리면서도, 언젠가는 혼자 설 힘을 얻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책임을 질수록 오히려 더 약해지는 것만 같았다. 책임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 거라는 기대와 달리, 그것은 나를 조금씩 무너뜨렸다.

이상한 역설이다. 책임을 다하려 애쓸수록 나는 더 작아지고, 버티면 버틸수록 더 무너진다. 마치 모래를 쥔 손을 더 세게 쥘수록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듯.

 

책임지는 삶이란 무엇일까? 매일 즐겁고 기쁠 수는 없겠지만, 매일 슬프고 화날 수도 없는 법이다. 감당할 수 있는 것들만 감당하고 살아도 괜찮다면,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책임감이란 길러지는 것일까, 타고나는 것일까? 나의 내면을 안다는 것은, 혹시 나의 통제와 책임이 미치는 경계를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다는 뜻일까?

 

사회에서 불합리를 넘어 부조리를 마주하게 되면, 우리는 누군가 책임지기를 바란다. 여기서 말하는 책임은 물러남이 아니라 법적, 사회적 책임이다. 명확한 응징이다. 그런데 개인의 삶 속에서 책임을 지는 방법은 그보다 훨씬 모호하다. 법도 없고, 심판도 없고, 명확한 기준도 없다. 그저 각자가 견딜 수 있는 만큼, 감당할 수 있는 방식으로 책임을 진다.

 

나는 쥐어짜듯 버티다가 나를 파괴하기로 했다. 나에게 소중한 기억들을 지우고, 쌓아온 자산을 내려놓고, 애써 모은 것들을 떼어내면서 책임지기로 했다. 남는 것이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아니, 남는 것이 없어야 한다고 믿었다. 내 역할을 다 못해 스스로 벌레가 되듯이, 내 책임을 다 못하면 나는 얼마나 힘든 하루하루를 견뎌야 할까. 그 두려움이 나를 이 방식으로 내몰았다.

 

하지만 문득, 이것이 책임을 지는 유일한 방법인지 의문이 든다. 책임은 자기 파괴로 완성되는 것일까?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이 책임일까? 아니면 견디고, 내려놓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 자체가 책임일까?

 

어쩌면 책임을 지는 방식에 정답은 없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끝까지 붙잡고, 누군가는 조용히 놓아주고, 누군가는 자신을 파괴하면서까지 감당하려 한다. 그 어떤 방식도 다른 방식보다 나은 것은 아니다. 단지 각자가 선택할 수 있는, 견딜 수 있는 방식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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