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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

적절한 낱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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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성시경이 일본 음식을 소개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면을 입에 넣고 한참을 씹더니 그가 말했다. "치아가 면을 끊는 순간의 저항감." 그냥 "쫄깃하다"고 해도 되는데, 그는 자신이 느낀 것을 정확하게 포착하려 애썼다.

더 인상적이었던 건 그 다음이었다. 그는 요리사가 아님에도 음식의 역사, 육수를 내는 방식, 지역마다 다른 면의 두께까지 일본 음식을 모르는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찬찬히 설명했다.

그 장면을 보며 생각했다. 이런 게 진짜 소통이구나. 자신이 경험한 것을 상대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옮겨내는 일.

 

나는 여러 유형의 사람들을 만나며 소통한다.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인다는 전제 아래에서도, 같은 주제를 놓고 나누는 대화의 밀도는 천차만별이다. 어떤 대화는 물 위를 스치듯 겉만 맴돈다. 어떤 대화는 상대가 내 말을 섣불리 재단해버려서 매번 "그게 아니라"를 반복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대화 속에 죄책감을 심거나, 세상을 어둡게 재단하는 말만 늘어놓는다. 그런 사람들과 대화를 마치고 나면 묘하게 지쳐 있는 나를 발견한다.

 

적절한 낱말이란 무엇일까. 어휘력의 문제가 아니다. 상대에 대한 애정, 최소한의 배려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내가 "힘들다"고 말할 때, 그것이 몸이 아픈 건지, 마음이 무거운 건지, 관계가 버거운 건지 구분하지 않으면 상대는 엉뚱한 위로를 건넨다. "지쳤어""서글퍼""막막해" 사이에는 각기 다른 결의 감정이 놓여 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그 차이를 놓친다.

 

언어는 사고다. 즉 언어의 한계는 사고의 한계다. 섬세한 낱말을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도, 타인의 처지도 섬세하게 들여다볼 수 없다.

 

얼마 전, 친구가 직장을 그만뒀다는 소식을 전했다. 나는 "?"라고 묻는 대신 "어떤 마음이었어?"라고 물었다. 친구는 한참을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번아웃이라기보다는...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느낌이 계속됐어."

그 문장 안에는 단순한 피로가 아닌, 존재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 담겨 있었다. 만약 친구가 "그냥 힘들어서"라고만 말했다면, 나는 "좀 쉬면 나아질 거야"라는 피상적인 위로를 건넸을 것이다. 정확한 낱말은 정확한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그런데 낱말의 선택만큼이나 중요한 게 있다. 대화의 톤과 속도다. 같은 문장도 어떤 톤으로, 어떤 속도로 건네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괜찮아"를 빠르게 던지면 상대의 말을 차단하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잠시 멈추고, 낮은 톤으로 천천히 말하면 진심 어린 위로가 된다.

 

누군가 힘든 이야기를 꺼낼 때, 나는 무의식적으로 말의 속도를 늦추게 된다. 상대가 말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게 된다. 그리고 한 템포 쉬었다가 대답한다. 그 여백이 "나는 당신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다"는 신호가 된다. 반대로 누군가 신이 나서 이야기할 때는 리듬을 맞춰진다. 그의 에너지에 호응하듯 빠르게 맞장구를 친다.

 

대화의 톤은 더 미묘하다. 같은 "그랬구나"도 공감의 톤으로 말하면 위로가 되지만, 무심한 톤으로 말하면 무관심이 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타인을 가르치려는 톤으로 말한다. "그러니까 네가 이렇게 했어야지." 그 순간 대화는 교감이 아니라 평가의 장이 되어버린다.

 

나는 가끔 대화를 마치고 나서 후회한다. 왜 그 순간 더 나은 낱말을 찾지 못했을까. 왜 나는 그렇게 빨리 대답했을까. 왜 상대의 말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지 못했을까. 왜 나는 위로하려다 오히려 상대를 움츠러들게 만들었을까.

 

"그러니까 말이야""어떻게 보면" 같은 표현들, "" "글쎄" 같은 짧은 숨. 이것들은 정보를 전달하지 않지만, 대화의 결을 만든다. 상대의 말을 경청하고 있음을 알리거나, 반론을 부드럽게 예고하거나, 공감의 여백을 만든다. 타이밍과 뉘앙스를 읽어내야 하기에 더 어렵다.

 

적절한 낱말을 선택한다는 것은 결국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이다. 상대를 온전히 보려는 시도이자, 나 자신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수고다. 쉽지 않다. 하지만 그 수고를 기꺼이 감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말은 듣는 이의 마음에 불편한 모서리를 남기지 않으면서도, 필요한 것은 분명하게 전달한다.

그들은 낱말과 낱말 사이의 여백까지 고민한다. 그 말을 건네는 순간의 톤과 속도까지 돌본다. 그렇게 쌓아 올린 언어의 정밀함이, 결국 관계의 단단함을 만든다.

 

그런데 나는 오늘도 이런 말을 들었다. “도대체 얼마나 더 가르쳐야 되겠노내가 이렇다.

그게 얼마나 지나한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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