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다

오르골 그림자

반응형

 

 

낮엔 무지갯빛이었다.

햇살이 바뀌자, 관람차 오르골은 벽 위에 다른 얼굴을 남겼다.

한때는 음악이 돌고, 빛이 흩어졌다.

지금은 멈췄다.

소리도, 회전도 없다.

남은 건 오직 그림자 하나.

나는 그 그림자를 오래 바라본다.

빛은 빠르고 변덕스럽다.

아침이면 길게 늘어지고, 한낮엔 쪼그라들고, 저녁엔 사라진다.

그림자는 그런 변화를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빛이 가는 대로 모양을 바꾸되,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킨다.

말도 없고 얼굴도 없지만, 모든 것을 그대로 베껴 산다.

묘하게 충성스럽다.

감정이 흐려질 땐 관찰이 유일한 구명줄이다.

뭔가를 자세히 본다는 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신호다.

색이 사라지니 형태가 드러난다.

그림자는 빛보다 솔직하다.

반응형

'수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적절한 낱말  (0) 2025.11.05
문턱에 선 듯 불안감을 주는 AGI  (2) 2025.10.17
금목서  (6) 2025.10.11
책임  (3) 2025.10.01
부조리, 세상의 맨 얼굴  (1) 2025.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