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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

문틈의 기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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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없이 서 있는 구조들. 그 사이에서 나는 오늘도 아주 작은 방향을 찾는다.

 

 

머릿속에는 문이 많다.

서로에게 기대어 미세하게 뒤틀린 문들.

어디에도 완전히 닿지 못한 상태로

바람이 스치면 제각기 다른 떨림을 흘린다.

 

문 하나에 손끝이 닿으면

가장 먼 문이 먼저 숨을 고르고,

열리지도 닫히지도 않은 기척이

내 안쪽으로 번져온다.

생각은 나에게서 시작되는 듯하다가도

틈의 어둠이 먼저 나를 읽어낼 때가 있다.

 

반쯤 열린 사이로

빛과 어둠이 서로의 가장자리를 잡아당기며 흐른다.

그 흐름이 어디로 닿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나를 잠시 평온하게 비워놓는다.

 

나는 그 경계를 넘지 않는다.

넘고 싶은 욕망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직 방향을 다 말하고 싶지 않아서.

문틈에서 흘러나오는 숨을 듣는 동안

내 쪽에서도 아주 미세한 떨림이

그 틈에 닿는다.

 

 

가끔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다.

문 앞에 서지 않는 사람들.

복도를 걷지 않고 목적지에만 닿는 사람들.

그들의 몸은 덜 지쳐 보인다.

 

나는 언제부턴가

복도가 목적지보다 길어졌다.

애초에 이랬는지,

걸으며 늘어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되돌아가는 길은

어느 순간 희미해졌거나, 처음부터 없었다.

 

 

가끔은 구조 전체가

자신의 무게를 내려놓는 순간이 있다.

지탱해야 한다는 강박을 쉬게 하고

바람의 결을 따라 문들이 제자리에서 흔들릴 때,

그 틈에서 나는

지나가는 숨결로만 존재한다.

 

흔들리는 건 문들이고

흔들림을 바라보는 건 나다.

서고, 듣고, 다시 서는 일.

겉보기엔 아무 변화도 없지만,

어느 쪽으로 미세하게 기울었는지

문들만 알고, 나만 아는 방향이 생긴다.

 

모두를 열 필요는 없다는 것,

그러나 문들이 있다는 사실을,

그 문들과 함께 산다는 것을

부인할 수도 없다는 것.

이것이 나를 무겁게 하는지

깊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무게를 안다.

 

 

어떤 날은 기척이 또렷하고

어떤 날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듣는다.

들린 것인지,

내 안이 울려 돌아온 메아리인지,

문이 먼저 부른 것인지,

내가 먼저 다가간 것인지 모른 채.

 

문들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아직도 무언가를 견디고 있고,

나는 그 문 앞에 또 선다.

 

오늘은 한 방향을

천천히 밝혀보려 한다.

문이 하나만 열려 있어도

세상은 어느 정도 움직이고,

나는 여전히

이 복도를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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