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먼저 연락하는 쪽은 대체로 정해져 있다. 답장이 늦어도 괜찮은 사람이 있고, 늦으면 마음이 먼저 무거워지는 사람이 있다. 같은 관계 안에 있어도 누군가는 더 자주 생각하고, 누군가는 더 늦게 반응한다. 관계는 처음부터 같은 무게로 놓이지 않는다.
이 불균형은 낯설지 않다. 대부분의 관계는 약간 기운 채로 시작한다. 공평한 출발은 오히려 예외에 가깝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의 기울어짐을 문제 삼지 않는다. 성향의 차이라고 넘기고, 시간이 지나면 익숙함이라는 말로 덮는다.
문제는 각도가 고정될 때 시작된다. 관계가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순간은 기울어짐이 생겼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각도가 시간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을 때다. 역할이 굳어진 관계는 사람의 중심을 조금씩 흔든다. 항상 먼저 연락하는 사람, 늘 이해해주는 사람. 그 자리에 오래 있다 보면, 배려는 성격처럼 오해되고 마음은 책임처럼 다뤄진다.
그런 관계를 몇 번 지나오고 나면, 태도가 달라진다. 나는 관계를 시작할 때부터 오래를 약속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가볍게 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감당할 수 있는 선을 미리 가늠해본다. 설명이 많아질 것 같으면 속도를 늦추고, 기대가 커질 것 같으면 한 발 물러선다. 더 애쓰는 쪽이 늘 나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버린 사람의 방식이다.
그때부터 관계는 선택의 문제가 된다. 누군가를 평가하거나 저울에 올려놓기보다는, 이 관계가 지금의 나에게 무리가 되지는 않는지를 먼저 살핀다. 서운하다는 말을 꺼내기 전에, 말하지 않아도 되는 쪽을 한 번 더 떠올린다. 이것은 냉정함이 아니라, 스스로를 소모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선택이다.
오랜 관계에서 상대가 여전히 나에게 더 많은 것을 건네고 있다면, 그 사람은 사소한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대개 그런 사람들은 주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는다. 우리는 그 침묵에 익숙해지고, 호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문제가 되는 순간은 그 상대성 속에서 내가 너무 쉽게 다뤄질 때다. 설명해야만 존중받고, 기다림이 기본값이 되며, 마음이 역할처럼 취급될 때 관계는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 있다. 이쯤 되면 관계는 유대라기보다 관리의 대상이 되고, 사람은 하나의 자리처럼 놓인다.
그래서 한 가지 기준이 필요해진다. 나를 대하는 태도에는 선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선언이 아니라 태도다. 누군가를 밀어내기 위한 말도, 관계를 줄이기 위한 명분도 아니다. 그저 관계 안에서 나의 위치를 더 이상 우연에 맡기지 않겠다는 뜻이다.
좋은 사람은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아니라, 관계 안에서 나를 함부로 다루지 않는 사람이다. 관계는 결국 남는다. 얼마나 오래였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함부로 다뤄지지 않았는지가.
그리고 그 안에서 천천히 닳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척하던 기억이, 이제는 말을 하지 않던 시간으로 남아 있다. 침묵은 포기가 아니라 선택이었다. 그 선택 속에서, 나는 조금씩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