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페에서 메뉴를 고를 때가 있다. 아메리카노, 라떼, 에스프레소. 논리적으로 따지자면 가격, 칼로리, 카페인 함량을 비교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지난번 마셨던 것, 지금 기분, 눈에 먼저 들어온 것으로 정한다.
그런데 실제 삶에서 사람들이 결정하는 방식을 보면, 제한된 합리성이라는 말조차 다소 친절하게 느껴진다.
친구는 6개월 동안 강아지를 키울지 고민했다. 노트에 장단점을 적었다. 키우고 싶은 이유는 열여덟 가지, 망설여지는 이유는 스물세 가지였다. 만날 때마다 같은 말을 했다. "키우고 싶은데, 시간이 없어." 그러다 주말에 보호소를 찾았다. 한 마리가 다가와 손을 핥고 눈을 마주쳤다. 3초였다. 6개월의 고민이 그 순간 정리되었다.
고민한다는 것과 결정을 미룬다는 것은 다르다. 친구의 노트에 적힌 스물세 가지 이유는 진짜 저울질이었을까. 6개월은 어쩌면 이미 내려진 결정을 인정하지 않으려던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비슷한 시기에 그는 이직도 고민했다. 엑셀 파일을 만들어 A사와 B사를 비교했다. 연봉, 복지, 통근시간, 승진 가능성, 회사 평판, 업무 강도. 계산 결과는 B사였다. 하지만 선택은 A사였다. 면접을 보러 갔을 때 복도의 조명이 따뜻했고, 면접관은 눈을 마주쳤고, 화장실은 깨끗했다. 그곳에서 일하는 자신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나중에 이유를 묻자 그는 "성장 가능성이 더 커 보여서"라고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결정의 이유는 아니었다.
병원에서도 같았다. 의사는 수술 성공률과 회복 기간, 부작용 가능성을 설명했고 통계와 사례가 이어졌다. 집에 와서는 논문을 읽고 후기를 찾았다. 생명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지막에 남은 것은 숫자가 아니었다. "선생님이 친절하시더라", "집에서 가까운 게 낫지 않겠니." 의학적 근거보다 마음이 먼저였다.
우리는 빠른 판단을 위해 지름길을 쓴다. 경험에 기대고, 첫인상에 끌리고, 일부 특징으로 전체를 판단한다. 머리로 생각하지만 결정은 다른 곳에서 내려진다. 그리고 나서 그럴듯한 이유를 붙인다.
문제는 결정 다음부터 시작된다.
강아지를 입양한 친구는 한 달 뒤 말했다. "생각보다 힘들어." 산책, 훈련, 병원비. 고민 목록에 적어 두었던 망설임들이 하나씩 현실이 되었다. 3초 만에 내린 선택을 이제는 매일 감당해야 했다. "그래도 후회는 안 해"라고 말했지만, 목소리에는 피로가 묻어 있었다.
직장도 다르지 않았다. A사의 조명은 여전히 따뜻했고 화장실도 깨끗했다. 하지만 업무는 예상과 달랐다. 야근이 잦았고, 관계는 생각보다 복잡했다. 면접장에서 그려졌던 자신과 현실의 자신 사이에는 간극이 있었다. 후회하느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답했다. 다만 결정할 때는 알 수 없었던 비용을 이제는 안다고 말했다. 감정이 결정을 밀어붙였다면, 이성은 그 이후를 책임진다.
의사결정은 합리적인가. 이 질문은 사실 두 개의 질문이다.
우리는 합리적으로 결정하는가. 대답은 '아니다'에 가깝다. 완전한 정보도 없고, 모든 대안을 검토할 시간도 없다. 제한된 조건 속에서 충분히 괜찮아 보이는 것을 고를 뿐이다.
그래도 괜찮은가. 대답은 '그렇다'에 가깝다. 사람들은 경험을 통해 배우고, 선택을 조정하며, 나름의 일관성을 만들어간다. 완전히 비합리적이라기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합리적이다.
하지만 세 번째 질문이 남는다. 결정 이후는 합리적인가.
여기서 다시 흔들린다. 결심은 빠르고, 실행은 느리다. 선택은 한순간이지만, 그 선택과 함께 살아가는 일은 매일 반복된다. 계획은 쉽게 무너지고, 다짐은 자주 흐려진다.
이 지점에서 생각은 개인의 선택을 넘어선다. 우리의 결정이 타인의 삶까지 좌우할 때. 선거다.
선거는 우리의 삶과 미래를 좌우하는 결정이다. 가장 중요해야 할 선택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선거에서 우리는 더 합리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정책의 세부를 끝까지 비교하지도 않고, 장기적 영향을 계산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말투, 이미지, 분위기에 더 쉽게 반응한다. 개인의 결정에서 작동하던 비합리성이, 집단의 선택에서는 더 크게 증폭된다. 책임은 나뉘고, 판단은 가벼워진다.
그럼에도 선거 이후의 시간은 가볍지 않다. 우리가 뽑은 사람들은 실제로 일을 해야 한다. 조직을 움직이고, 예산을 쓰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조율해야 한다. 임명직이든 선출직이든, 그 자리가 작동하려면 결국 일정한 수준의 능력과 태도가 필요하다. 공공의 일을 맡는다는 건, 결정의 순간보다 결정 이후를 더 오래 감당하는 일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기준은 자주 흐려진다.
그래서 기준은 오히려 단순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일하는 사람인가.
결정을 내려놓고 사라지는 사람이 아니라, 결정 이후를 감당하는 사람인가. 결과 앞에서 변명하지 않고, 일을 이어가는 사람인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인가. 실패를 인정하는 사람인가.
이건 거창한 이상이 아니라 최소한의 조건이다. 그리고 앞서 말한 모든 선택의 문제와 이어진다. 의사결정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선택의 순도가 아니라, 선택 이후의 태도다.
연말이 되면 사람들은 사주나 신점을 본다. 돈을 쓴다. 부적을 사고, 의식을 치르고, 한 번에 바뀌기를 바란다. 실제로 변화가 쌓이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 순간의 안도감을 산다. 불안한 미래 앞에서 통제감을 얻는 방식이다. 선거도 일종의 불안을 달래는 의식이 아닐까.
다만 이 의식은 무용하지 않다. 불완전한 선택이라도 집단이 함께 감당할 때, 그것은 최소한의 방향성이 된다. 문제는 그 방향을 믿지 않으면서도 의식만 반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진짜 합리성은 결정의 순간이 아니라 지속에 있다. 완벽한 선택을 하는 능력이 아니라, 불완전한 선택을 끌고 가는 능력. 감정으로 시작했더라도, 현실 속에서 조정해 나가는 힘이다.
카페 메뉴판 앞에 선다. 오늘은 무엇을 마실까. 지금 이 순간 끌리는 것을 고른다. 그리고 그것을 마신다. 마시고 나서 생각한다. 괜찮았나, 다음엔 뭘 마실까.
결정은 순간이지만 삶은 연속이다.
합리적으로 결정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결정한 것과 함께 합리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게 어쩌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합리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