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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영화

진격의 거인 Episode 94 이후, 끝내 남은 벽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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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ajime Isayama / Kodansha / MAPPA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 본편 스틸

 

 

넷플릭스에서 94화를 시작한다는 건 가벼운 클릭이 아니다. “거기까지 가면 끝까지 간 거다.” 농담 같은 말이었지만, 오타쿠 특유의 과장된 확신과 이 작품을 둘러싼 팬덤의 밀도가 묘하게 겹쳐 들렸다. 첫 화를 재생하는 순간, 나는 그 말이 왜 나왔는지 조금은 알게 되었다. 이 세계는 들어가는 건 쉽지만 빠져나오는 건 어렵게 설계된 이야기였다.

 

이야기는 거대한 벽 안에서 시작된다. 벽 밖에는 인간을 잡아먹는 거인들이 있고, 사람들은 백 년 넘게 그 벽 안에서 두려움과 함께 살아왔다. 주인공 엘런은 어린 시절, 벽을 넘어온 거인에게 어머니를 잃는다. “이 세상에서 거인을 한 마리도 남김없이 구축하겠다.” 복수와 자유를 향한 이 절규가, 긴 여정의 시작이 된다.

 

하지만 이야기는 인간과 거인의 단순한 충돌로 흘러가지 않는다. 벽이 무너지고, 거인의 정체가 드러나고, 세계의 구조가 밝혀지는 순간 이 작품은 완전히 다른 장르가 된다. 거인은 사실 인간이었다. 벽 안의 사람들은 과거 대륙을 지배했던 엘디아 제국의 후손이었고, 벽 밖의 마레는 그 과거를 죄로 규정하며 엘디아인을 악마라 부르고 박해해왔다. 피해와 가해의 위치는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초반은 솔직히 버거웠다. 대사들은 말이 아니라 외침에 가까웠고, 그 감정은 다른 인물에게 번져 집단의 함성처럼 부풀었다. 일본 애니 특유의 감정 과잉, 전쟁 시기 동원의 문장과 닮은 톤, 여기에 과거 서사와 복선이 끊임없이 겹쳐졌다. 몇 번이나 멈추고 싶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단순해 보였던 장면이 10화 뒤 새로운 의미로 돌아오고, 사라진 인물의 선택이 또 다른 충돌의 불씨가 되기 때문이다. 피곤한데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여기까지 왔는데 그만둘 수 있나?'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 시점부터 왜 이 작품이 수년 동안 논쟁의 중심이 되었는지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

 

이 지점에서 작품에 흐르는 일본적 정서가 드러난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배경은 유독 자국의 풍경이 아니다. 유럽 고전 문학과 서구 문화를 각색한 작품들이 넘쳐나고, 중세 유럽풍의 건축과 거리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고유의 문화보다 서구의 외형을 빌려 이야기를 펼치는 이 습관은, 아시아에 속하면서도 스스로를 그 범주 밖에 두려 했던 근대 일본의 자의식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개인보다 집단이 앞서는 사고 구조, 겉으론 절제된 듯 보이나 내면의 감정을 폭발시키는 방식. 이 작품의 감정 구조는 그런 배경을 거쳐 더 선명해진다.

 

라이너가 자신이 벽을 부쉈다고 고백하는 장면이 그 심연의 입구였다. 그는 마레의 전사 후보생으로 성장했고, “벽 안의 엘디아인은 악마다라는 신념을 주입받았다. 그래서 벽을 부쉈다. 그러나 벽 안 사람들은 악마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이 왜 그곳에 갇혀 사는지조차 모르는, 그저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라이너는 자신이 무너뜨린 것이 벽이 아니라 수천 명의 삶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붕괴한다.

 

엘런도 변한다. 어머니를 잃은 소년의 분노에서, 세계의 모순을 처음 본 청년의 혼란으로. 그는 라이너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 “저 바다 건너편의 적을 모두 없애면 우리는 자유로워지는 걸까?” 피해자였던 엘런이 가해자의 언어를 말하기 시작한 순간, 이야기는 단순히 해석할 수 없는 무게로 내려앉는다.

 

이 작품의 가장 잔인한 진실은 단순하다.

마레와 엘디아는 서로를 악마라 부르지만, 엘디아인은 본래 하나의 민족이었다는 사실이다.

마레는 엘디아인을 차별하면서도 그 능력을 병기로 쓰고, 파라디 섬의 왕정은 사람들을 보호하겠다며 진실을 숨기고 기억을 조작했다. 벽 밖의 엘디아인은 마레의 전사가 되어 같은 혈통과 싸우고, 벽 안의 엘디아인은 진실조차 모른 채 격리됐다. 결국 이 전쟁은 마레 대 엘디아가 아니라 엘디아인 대 엘디아인이었다. 같은 피, 다른 이름, 반복되는 증오. 라이너는 벽을 부쉈지만, 그가 죽인 사람들도 엘디아인이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같은 혈통 안에서 돌고 돈다. 천 년이 지나도록.

 

조사병단이 처음 바다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아이처럼 웃으며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아르민이 꿈꾸던 푸른 수평선, 사샤가 처음 맛본 짠 바닷물. 벽 안에서 살아온 이들에게 바다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증명이었다. 그러나 엘런만은 웃지 않았다. 그는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며 조용히 서 있었다. 그 침묵은 바다를 경계가 아닌 또 다른 전쟁의 문으로 바꾸었다. 이 장면이 작품 전체의 전환점이다. 자유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이 발견한 건 더 넓은 증오와 더 복잡한 역사뿐이었다.

 

폭력의 근원은 힘이 아니라 두려움이다. 그래서 거인의 힘이 사라져도 세계는 변하지 않았다.

국가의 경계는 그대로였고, 그 경계가 낳는 증오는 계속되었다. 인류의 80%가 사라진 뒤 남은 세계는 승리도 희망도 아니었다. 평화는 기능처럼 유지되었고, 전쟁은 습관처럼 반복되었다. 거인의 힘은 사라졌지만, 악의 구조, 증오의 역사, 집단의 광기, 국가의 불신은 변하지 않았다. 세계는 다시 시작되는 듯 보였지만, 본질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3평 남짓한 독방이 신체를 가두듯, 공간이 확장될수록 인간은 자유의 감각을 되찾는다.

이 애니메이션은 그런 자유라는 개념을 각기 다른 시선으로 비틀어 보여주고, 그 굵은 선 위에 사랑이라는 질긴 감정이 겹쳐진다. 그 두 선 사이에 일본이 지나온 역사와 정서가 뒤엉켜 독특한 결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묘하게도, 흔들린 건 작품의 세계가 아니라 오래 말 없이 서 있던 내 안의 벽이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되 개입하지 않던 거리, 이해는 하되 공감까지는 하지 않던 선, 내 삶과는 무관하다고 그어놓았던 경계. 그 벽을 넘을지, 깎아낼지, 아니면 그대로 둘지 아직 모르겠다. 94화를 지나온 지금 나는 그저 그 앞에 잠시 멈춰 서서, 그 벽이 어디서 시작되어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조용히 더듬어보고 있을 뿐이다.

 

긴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잔인함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안의 광기까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이 압도적인 세계를 아무 저항 없이 따라간다면, 어쩌면 나도 모르게 잘못된 역사 위에 서 있는 건 아닐까.

 

그 의문은 결국 작품이 드러낸 진실과 맞닿아 있다. 폭력의 기원은 힘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그 두려움이 언어와 제도를 바꾸며 세대를 통과할 때, 개인의 판단은 쉽게 흐려지고, 집단의 믿음은 자연스럽게 진실처럼 굳어진다.

 

그래서 나는 작품의 세계를 읽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현실의 구조를 떠올리게 된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배우고, 얼마나 무의식적으로 따라가며, 얼마나 깊게 적응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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