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멀리서 영화 한 편을 보내왔다. 이역만리, 중국에서. 메시지는 짧았다.
"혹시 영화 은교 보셨나요?"
안 봤다고 했다. 그랬더니 돌아온 말.
"혹시 괜찮으면 한번 봐봐요."
〈은교〉를 아무한테나 편하게 권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봤다. 혼자, 밤에. 억누르고 있지만 사라지지 않는 감정. 가져선 안 될 것 같지만 자꾸 손이 가는 마음. 그게 이 영화라는 걸 보내준 사람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영화는 천천히 시작된다.
일흔 살의 시인 이적호. 그의 마당에 어느 날 열일곱 소녀 은교가 들어온다. 담을 넘다가, 그냥 우연히. 아무 의도 없이. 그런데 이적호에게 그 우연은 오래 잠들어 있던 무언가를 깨우는 소리였다.
그는 은교를 바라본다. 오래, 너무 오래. 그리고 시를 쓴다.
영화를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저 사람이 이적호일까, 은교일까. 내가 이적호일까, 은교일까. 누가 누구인지 맞춰보려고 계속 들여다보게 된다. 그러나 그 질문은 끝내 답이 나오지 않는다.
이적호는 말이 없다. 그냥 곁에 있었고, 연필을 깎았고, 바라봤다. 말이 화려할수록 진심과 멀어질 때가 있다. 이적호는 그걸 알았는지 몰랐는지 끝까지 화려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은교는 모른다.
자기가 누군가의 시가 됐다는 것도. 누군가의 전부가 됐다는 것도. 거울을 봐도 자기가 얼마나 눈부신지 모른다. 상대방이 자신을 보는 눈이랑, 자신이 스스로를 보는 눈이 다르다는 것을 은교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모른다.
사실 두 남자 중에 은교를 진짜 은교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적호는 자기 감정의 거울로, 서지우는 욕망의 도구로. 은교는 끝까지 혼자였다. 거울 속 자기를 모른 채로.
서지우가 있다. 젊고, 능숙하고, 언어가 화려하다. 그는 스승의 시를 훔친다. 은교에 대해 쓴 시를. 이적호의 가장 깊은 감정이 담긴 것을. 그리고 상을 받는다. 빛난다.
가진 것과 진짜인 것은 다르다.
진짜인 것과 가짜인 것이 구분되기 시작하는 순간이 이 영화에 있다. 화려한 것들 사이에서 조용히. 말없이.
이적호는 혼자 말한다.
"잘 가라, 은교야."
은교는 듣지 못한다. 그 자리에 없다. 나무로 만든 옷을 입기 전, 그가 마지막으로 꺼낸 문장이다. 평생 시를 썼던 사람이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끝내 혼자 삭였다.
마음을 말로 만드는 게 제일 어렵다.
시인도 그랬다.
은교는 결국 알게 된다. 너무 늦게.
울면서 찾아와 말한다.
"대신해줄 수 없는 거잖아요."
없어지고 나서야. 그 시가 누구의 것인지. 그 침묵이 얼마나 깊었는지. 거울 속 자기가 얼마나 눈부셨는지.
말 못 하는 사람들끼리 끝내 엇갈렸다.
영화가 끝나고 한참을 앉아있었다.
그런 사람이 있다. 이적호이기도 하고 은교이기도 한. 바라보는 건 이적호처럼, 기다리면 내가 왔던 건 은교처럼. 그리고 나 역시 늘 먼저 다가갔지만 거울 속 자기를 모르는 은교처럼 혼자 영화를 보고 있었다.
누가 누구인지 맞추려 했는데. 우리 둘 다 이적호이고, 우리 둘 다 은교였다.
말 못 하는 사람이 말 대신 영화를 보낸 거라면 그게 이적호가 연필을 깎아준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
아직 말 못 한 게 있다면, 지금이에요.
나무로 만든 옷을 입고 나면 늦어요.
이적호가 먼저가 아니었어도 은교가 꽃을 들고 왔잖아요.
영화 속에서 딱 한 번, 이적호가 먼저 움직였다.
은교가 말했다.
"생신 축하드려요."
이적호는 말 없이 안아줬다. 평생 말 못 했던 사람이 그 한 마디에 몸으로 답했다.
“생신 축하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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