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를 보고 나서 특별히 남는 건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남기지 않으려는 영화처럼 보였다.
넷플릭스에서 하나 보고 끄는 느낌.
불편한데 화나지는 않고, 이해되는데 오래 생각나지는 않는다.
연기는 역시 좋았고, 배우들은 많이 늙었다.
나도 늙었고,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도 이미 여러 번 지나온 질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몇 문장만은 귀에 붙었다.
“다 이뤘다.”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었다.”
이 세 문장은 영화의 줄거리이자,
요즘 우리가 세상을 설명할 때 가장 자주 쓰는 문법이다.
영화 초반, 주인공은 다 이뤘다고 말한다.
집도 있고, 가족도 있고, 개도 있고, 직장도 있다.
문제는 그 ‘이룸’이 너무 정돈돼 있다는 데 있다.
삶이라기보다 이력서에 가깝다.
칸이 정확히 채워져 있고, 여백이 없다.
그래서 하나가 빠지는 순간, 전체가 무너진다.
실직은 사건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진짜 문제는 실직 자체가 아니다.
실직을 받아들이는 태도다.
주인공은 실직을 삶의 한 국면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자기 인생 전체에 대한 판결로 받아들인다.
25년을 성실히 살아왔다는 믿음이 흔들리는 걸
그는 끝내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발버둥친다.
그 발버둥이 이해된다.
같은 25년 종이밥을 먹은 사람을 보며
연대보다 경쟁이 먼저 떠오르는 마음도,
나만 밀려날 수는 없다는 계산도 낯설지 않다.
그는 악해서라기보다 너무 논리적이다.
그리고 그 논리가 끝까지 가면, 사람은 계산에서 빠진다.
사무실에서의 유능함이
어느 순간 살인의 유능함으로 치환될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이 여전히 ‘쓸모 있는 인재’임을
증명받은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에게 살인은 타락이 아니라
재취업을 위한 눈물겨운 직무 교육이었을지도 모른다.
기획하듯 계획하고,
보고서 쓰듯 정리하고,
면접을 준비하듯 리스크를 제거한다.
그는 경쟁자들의 사연을 들으며 연민을 느끼지 않는다.
대신 이런 논리를 완성한다.
‘저 사람도 나만큼 절박하구나.
그러니 내가 먼저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겠구나.’
이 논리는 감정이 제거된 상태에서만 작동한다.
타인의 불행은 공감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가해를 정당화하는 통계 자료가 된다.
그는 잔인해진 것이 아니라,
끝까지 회사원으로 남아 있었을 뿐이다.
영화에서 가장 기묘한 인물은 치과의사다.
성공했고, 안정돼 있고, 아무렇지도 않다.
도덕도, 죄책감도, 설명도 없다.
그는 이 세계에 가장 잘 적응한 인간처럼 보인다.
그래서 가장 비현실적이다.
아니, 어쩌면 가장 현실적이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매일 본다.
죄책감 없이 잘 사는 사람들.
그들은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애초에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딸은 또 다르다.
많은 관객이 딸을 보며 병명을 떠올리지만,
나는 오히려 미래를 보는 기분이었다.
딸의 연주는 연주가 아니라 악보였다.
감정이 아니라 기록.
이렇게 흘러왔고, 이렇게 흘러갈 거라는 정리.
용서도 비난도 없는 상태.
그녀는 이미 아버지를 판단하지 않는다.
그저 받아 적었을 뿐이다.
결국 주인공은 취직을 한다.
개들도 돌아온다.
모든 게 회복된 것처럼 보인다.
이 장면이 이 영화에서 가장 무섭다.
잘못된 선택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복귀했기 때문이다.
다시 칸이 채워졌다.
그러니 이제 괜찮다.
정말 괜찮은가?
그래서 마지막에 귀에 걸리는 문장은 이거다.
“어쩔 수 없었다.”
이 말은 변명이 아니라 기술이다.
책임을 상황으로 이동시키는 기술.
주어를 지우는 문장.
우리는 이 문장을 너무 자주 쓴다.
회사에서, 정치에서, 인간관계에서.
그리고 이 문장을 말하는 순간,
우리는 조금씩 자기 자리에서 빠져나온다.
주인공이 개에게 집착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가 회복한 유일한 ‘권력’이기 때문이다.
무력한 실직자였던 그는
개 앞에서만은 다시 고용주이자 지배자가 된다.
그가 끝내 집으로 돌아와 개를 안을 때,
그 장면은 가족애의 회복이라기보다
무너진 지배 질서의 복구처럼 보인다.
이 영화를 보며 우리가 끝내 분노하지 않는 이유는,
주인공의 선택이 잔인해서가 아니라
그가 선택하지 않은 다른 길을
우리 역시 거의 떠올리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연대는 늘 옳은 말처럼 들리지만,
이 영화의 세계에서 연대는
너무 느리고, 너무 불확실하고, 무엇보다 너무 비싸다.
당장 살아남아야 하는 사람에게
연대는 미래형 문장일 뿐, 현재형 동사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개를 끄덕인다.
“어쩔 수 없었겠지.”
그 고개 끄덕임 속에서
연대는 실패한 선택이 아니라
아예 상상되지 않는 선택이 된다.
이 영화가 남긴 질문은 거창하지 않다.
왜 연대하지 않았는가가 아니라,
언제부터 연대가
현실적인 선택처럼 느껴지지 않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이다.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기 전에,
정말 그 선택 말고는 없었는지
잠깐 멈춰 서게 만드는 정도.
그 정도면,
이 영화는 자기 할 일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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