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울산의 하루

그런 아침

반응형

 

삼일째 비가 온다. 잠들기 전에도 들었고, 새벽에 눈을 떴을 때도 들었다. 밤을 건너온 소리다. 오래 기다린 비라 창밖을 보지 않아도 좋다.

 

이틀 동안 나를 붙잡고 흔들던 두통이 조금 물러났다.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고, 어제까지 머리 한쪽을 제 것처럼 차지하고 있던 것이 조금 뒤로 갔다. 비가 오고, 머리는 덜 아프고, 어딘가 논은 젖고 있을 것이다. 비를 기다린 건 나였는데 막상 비가 오니 먼저 떠오르는 건 땅이다. 별 관계도 없는 것들이 한꺼번에 괜찮아진 아침이다.

 

이상하게 조건이 갖춰졌다는 생각이 든다. 무슨 조건인지는 모르겠다.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를 떠나기로 한 것도 아니고, 오래 미뤄둔 일을 시작해야 하는 날도 아니다. 드래곤볼이라도 모으듯 필요한 것들이 하나씩 다 모인 느낌이다.

 

가만히 빗소리를 듣다가 밖으로 나가고 싶어졌다. 고개를 들고 맞아보고 싶었다. 들어가 보고, 젖어 보고, 바닥에도 한번 누워보고 싶었다. 그러면 빗물인지 눈물인지 아무도 모르겠지.

 

요즘은 기분 한번 내는 데도 몸의 눈치를 본다. 비를 맞는 일 하나에도 그다음 날이 붙는다. 젖은 옷, 식은 몸, 칼칼해질 목. 예전에는 하고 싶은 일이 먼저였는데 이제는 결과가 먼저 도착한다. 마음이 문을 열기도 전에 몸이 계산기를 두드린다. 예전의 나였다면 이미 세 번은 젖어 있었을 것이다.

 

내 안에는 늘 두세 명쯤 있다. 한 명은 이미 신발을 신고 있다. 언제 신었는지 모르겠다. 한 명은 현관에서 팔짱을 끼고 있고 또 한 명은 이불 속에서 이 모든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표정을 짓는다. 셋은 번갈아 나이가 든다. 어떤 날에는 그중 하나가 나머지를 무시하고 문을 열어버린다. 앞뒤 보지 않고, 가고 싶으면 가는 쪽으로. 그러다 어떤 날에는 셋이 동시에 조용해진다. 그날이 가장 무겁다.

 

하고 싶은 게 없어지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순간마다 반대편에서 의견을 내는 내가 늘어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제 마음 하나로는 부족하다. 비도 와야 하고, 몸도 괜찮아야 하고, 내일 일정도 없어야 한다. 오늘쯤은 그래도 된다는 이유가 하나쯤 있어야 한다.

 

오늘 아침에는 그것들이 다 와 있다. 아직 이른 시간이고, 누구에게도 설명할 일도 없다. 이 정도면 되지 않았을까 싶다가, 우습게도 그런 생각이 든다. 그냥 가면 안 돼? 누가 안 된다고 한 사람도 없는데.

 

일단 커피나 갈아야겠다. 원두를 갈고 물을 받았다.

향이 빗소리 위로 잠깐 올라왔다 내려앉았다.

 

반응형

'울산의 하루'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판본  (0) 2026.08.08
여름을 함께 보내는 법  (0) 2026.08.04
했음, 안 했음  (0) 2026.07.21
말이 증거가 되는 관계  (0) 2026.07.08
그렇게 깎아서 나아지는 것은 없다  (0) 2026.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