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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

걷기의 즐거움

이동수단이었던 걷기가 즐거움이 되는 나이이다.

아니 꼭 나이가 이유가 아니다. 나는 급하고 젊고 생생하니까. 으하하하

 

허리가 아파지고는 건강을 위해 일부러 걷기를 시작했다. 점심을 먹고 일부러 골목길을 걸어 들어가기도 하고, 저녁 산책도 늘렸다.

 

이동수단, 시간으로서의 걷기에서 걷기를 위한 걷기를 하니 공간 속 이야기가 보인다.

 

능소화가 흐트러진 저 담장 안 따뜻한 집은 옛날 양반집이었을까?

전 반찬가게에는 짜지 않은 반찬을 보유하고 있을까?

저 카페는 사장님이 건물주일까? 아님 세를 맞추느라 손목이 나가도록 커피 가루를 두드리고 있을까?

 

내가 특히 좋아하는 걷기 장소는 집 앞 공원이다.

집 앞 공원은 낮은 산과 호수를 끼고 제법 꼬불꼬불 길어서 여러 방향으로 잘 걸으면 왕복 60분도 걸을 수 있을 정도인데, 산이 있어서 그런지 사계절을 살피는 맛이 있다.

저녁을 먹고 산책을 나서는 첫 번째 코스는 공원 앞 카페에서 아이스라떼를 사서 갈 것인지 그냥 걸을 것인지의 결정이다.

카페 앞에 항상 진을 치고 앉아 있는 터줏대감 길고양이는 그 인근 상인들이 밥과 잠자리를 챙겨줘서 자르르 윤이 나는 털과 포동포동한 살을 가진 치즈냥인데 편의점 앞 아이스크림 냉장고 뒤에 아이스박스로 된 집도 가진 녀석이다.

터줏대감에게 아이고, 대감님 나와계십니까?” 인사를 하면 그 녀석은 피하기는커녕 사진을 찍거나 만지는 것도 허용해 주니,, 명실공히 공원 앞 터줏대감이다.

더구나 올봄에는 터줏대감과 매우 흡사한 미니 치즈냥 4마리가 인근을 떠도는 것을 보니, 자식에게 영역을 공유하고 있는 마음 넓은 대감님이 분명하다.

 

도심 속 작은 공원인데도 안으로 들어가면 밖보다 최소 1는 낮은 게 분명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입구 수국밭을 지나 호숫가로 걸어가면 벌써 배롱나무의 진분홍 꽃이 우리를 반긴다. 여름이다.

생각도 정리된다. 혼자 걸어도 좋고, 함께 걸어도 좋다.

 

저 멀리 당당이와 당당이 할아버지가 보인다. 당당이는 아주 작은 갈색 요크셔테리어인데, 아주 어린 강아지 때부터 산책 나온 모습을 본 강아지다. 당당이와 당당이 할아버지는 늘 일정한 시간에 나오시는데, 어린 당당이가 지 할아버지 빽을 믿고 어찌나 당당하게 3보 1킁을 해 가며 여기저기 모든 화단을 참견하며 가는지... 나는 그 당당한 모습에 이름을 당당이라고 짓고 만날 때마다 속으로 “당당아, 안녕? 순찰 나왔니?”라고 인사하고 있다.

당당이 할아버지는 늘 깔끔한 모습의 키가 큰 어르신인데 당당이가 여기저기 냄새를 맡고 영역표시를 할 때마다 그 모든 걸 다 기다리며 천천히 산책을 하신다. 당당이는 공원에서 만난 강아지 중 가장 행복한 강아지다.

 

걷기를 하고서야 달토끼를 만났다. 어릴 적 아무리 찾아도 눈에 안 보이던 달토끼는 과연 큰 보름달 안에 옆으로 엉덩이를 쑥 내밀고 방아를 찍는 모습이었다.

“어..어! 저기 진짜 토끼다!”

어찌나 신기하고 반갑던지 저기가 엉덩이고 옆으로 선 모습이네. 하면서 흉내도 내본다.

 

한 달 동안 서서히 서에서 동으로 이동하면서 차오르고 내리는 달의 모습도, 비 내린 다음날 쑥 올라와 있는 못생긴 작은 버섯들도, 튤립이며 배롱나무도 공원 안에 자기 이야기를 가지고 자리 잡고 있다.

 

걷기는 공간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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