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다

그러지는 말자

나만 먹고살 수 있다면 어떤 모욕이라도 감내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먹고 사는 다양한 방법이 있겠고 또 그들은 존중하지만 분명 시대적 금도가 있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다.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 간절함이 있다. 선택의 방법은 다양하지만 단식도 그러하다.

죽음과 간절함이 공존하고 대립하는 뉴스를 종종 볼 수 있다.

 

이러한 간절함은 옳고 그름을 떠나 상대적 약자들이 최후의 수단으로 선택한다.

가진 자들 앞에 목숨을 내놓는다.

 

그러나 최후의 수단으로 선택한 간절함이 경시되고 유린당하면서 인격까지 위협받는 모습이 보인다. 나는 그렇게 보인다.

 

회피와 방조. 자신의 권리에 무감각한 사람, 나아가 이를 타인이 멋대로 휘두를 수 있게 내버려 두는 사람은 인간의 의무를 무시하거나, 경시하거나...

 

개인이든 아니든 권리가 권력에 의해 부당하게 침해당할 때 다양한 투쟁이 시작되고, 투쟁에 소명이 더해지고 가진 것이 없을 때 목숨을 담보한다.

개인적 차원의 투쟁이 사회적 차원의 권리 투쟁으로 이어지고, 이 과정에서 우리는 공감하고 토론하고 종국에는 법이 만들어지고 양보한다. 이념이나 팬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을 말하는 것이고 함께 사는 사회를 말하는 것이다.

 

극한의 수단까지 동원해 항의하고 있는데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비아냥거림과 진정성을 의심받기도 한다. 이 웃지 못할 상황에 우리 사회 전체가 빠져 있는 심각성이 느껴진다.

 

그렇다고 목숨을 건 투쟁을 무조건 옹호할 수도 없다. 단식투쟁은 그 본성상 본인의 생명을 위태롭게 함으로써 원하는 바를 얻고자 하는, 일종의 자기 인질극이기 때문이다. 단식투쟁의 요구조건이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라면 문제는 더욱 커진다.

 

그러나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것인 본인의 생명을 내거는 일이 어떤 저항의 수단도 갖지 못한 이가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방편이라는 점을 공감했으면 한다.

 

우리는 들어 보아야 한다.

 

우리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선출 또는 임명되어 사회를 이끌어 나간다. 내 주변도 다양한 사람들이 포진해 있듯이 그들도 마찬가지 일거다. 별다른 수준을 기대하기 힘들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은 게 있다. 그럴 수는 없는 것들.

피해자 앞의 돈벌이 영상, 단식자 앞에서의 먹방, 피해자 가족이 보이지 않는 돈벌이 기사에 내몰린 기자들.

 

사안별 유불리만으로 생을 살아가는 그들은 입장이 바뀌어도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거다.

 

 

 

'수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136) 2023.09.28
나만의 커피 찾기  (84) 2023.09.22
말을 걸어오는 노래  (78) 2023.09.20
오늘을 기념한다  (106) 2023.09.15
소통의 수단인가 오해의 장벽인가... 언어  (91) 2023.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