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쩌다 어른이 되었다.
왜 어쩌다가 어른이 되었냐면, 그 누구도 어른이 되는 법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어른자리에 있다.
지금도 그렇다.
아무도 어른이 되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고 어쩌다 보니 어른이 되는 세상이다.
옛날. 그러니까 조선시대쯤의 옛날.
어른의 모습과 답이 정해져 있던 시절에 좀 더 어른이 되는 게 수월했을 것 같다. (삶이 수월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태어나면 노인이나 손윗형제가 나를 돌보고, 걷기 시작하면 형제와 동네 아이들을 따라다닌다. 꼴도 메고, 잡초도 뽑고 새참도 나르다가 동생도 돌본다. 자연스럽게 내가 할 일을 배우고, 마을의 손위 사람들을 보고 어른의 모습을 받아들인다.
생로병사와 삶이 집과 마을에서 이루어진다.
지금은 조금 어렵다.
출생부터가 어렵다.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는 건 더 이상 자연스럽지가 않다.
선택의 영역이 되어 선택받아야 출생을 한다.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므로 출산은 병원에서 이루어지고, 육아를 누가 어떻게 할 것인지도 선택의 영역이다.
하지만 부모도 잘 알아서 선택을 하는 건 아니다. 마을에서 보고 배운바가 없으므로 또 나이와 직장과 경제와 양가 부모님의 사정에 따라 선택의 폭이 달라지므로 힘들고 어렵다.
마을 공동체는 아니지만 대부분 기관을 통해 집단 육아(교육)를 하는데 더 이상 손위는 없다. 나이로 자른 집단에 들어가서 어른이 정해놓은 교육을 받는다.
같은 나이 아이들을 모아 보육(교육)을 하는 개념을 100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이상하고 상당히 폭력적인 발상이지만, 이미 나도 부모세대로 그렇게 자랐기에 그것이 당연한 줄 안다.
아이를 키워보거나 키우는 것을 본 적은 없지만 다들 학교는 다녀봤기에 부모들은 교육을 크게 생각한다. 오죽하면 ‘공부는 못해도 좋다. 착하게만 자라다오.’라고 인성이라는 개념을 말할 때도 공부를 전제로 둘까.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독립. 즉 어른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어린시절 학교라는 곳에서 같은 나이의 집단교육의 힘이 너무 커서, 마치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이 어른이 되는 과정이 되어 버렸다.
내가 나를 찾고, 나를 챙기고, 한 사람의 몫을 하는 어른이 되는 과정에 또래 집단과의 경쟁이나 성적은 상관없는데 부가 주를 눌러 버린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아는 지식은 학교에서 배웠지만 삶을 살아가는 방법은 가정에서 배웠다.
이를 닦는 습관, 분리수거 하는 방법, 고장난 물건을 취급하는 방법, 동물을 대하는 태도, 분노를 관리하는 방법,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실수는 어떻게 고치는지, 다양성에 대해 어떻게 접근하는지, 나 자신을 어떻게 돌보는지.
부모님과 살아가며 그 태도를 배워서 어른이 된다.
학교가 아니다.
몇 학년 몇 반의 누구에서 진짜의 나 000.
나로 불리는 장소는 집이다.
눈을 맞추고 나를 봐주는 시간.
큰 의미없는 대답에도 관심과 박수가 나오는 장소.
부모가 아이를 키운다.
부모가 아이를 키워 독립시키고, 어른으로 만든다.
부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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