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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영화

퍼펙트 데이즈

 

 

완벽한 나날들...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도쿄에서 공중화장실을 청소하는 청소부의 일상을 그린 영화이다.

이로써 영화 소개 끝!!

왜냐하면 정말로 그의 일상을 그린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가 누구인지, 어떤 사연으로 청소일을 시작했는지, 가족이나 친구는 누구인지 그 어떠한 배경도 심지어 대사도 거의 나오지 않는다.

일정한 루틴을 살아가는 그는 매일 비질 소리에 잠에서 깨어 이불을 개고 이를 닦고, 작은 화분에 물을 준 뒤 옷을 입고, 순서대로 정리된 지갑과 열쇠를 챙겨 집을 나와 자판기에서 커피 캔을 산 뒤, 시동을 걸고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들으며 출근한다.

꼼꼼하고 성실하게 예쁜 도쿄의 화장실들을 청소하고(올림픽을 준비하며 고친 도쿄의 화장실은 정말로 예쁘다), 점심은 신사 공원에서 샌드위치를 먹는다.

공원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항상 마주치는 사람은 매일 만나서 서로를 알고는 있지만 대화를 나누거나 하지는 않는다. 눈인사 정도는 하지만, 불편해하는 기색이 보이면 선을 넘지 않는다.

필름 카메라로 매일 나뭇잎 사이 하늘을 찍고, 행위예술을 하는 나무 할아버지를 보고, 타워와 사람들을 보며 같은 길을 달려 퇴근한다.

퇴근 후에는 자전거를 타고 목욕을 간다. 같은 손님인 할아버지들 사이에서 몸을 담그고, 지하상가의 같은 식당에서 같은 인사말을 들으며 한 잔의 술을 마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독서를 하다가, 흔들리는 흑백의 꿈을 꾸며 잠을 잔다.

그야말로 루틴이 있는 대문자 T의 삶.

 

누군가는 그의 루틴을 답답하고 어둡다고 느끼겠다마는 나는 영화 초반 겨우 3일을 그와 함께 일어나고 출근하며 살았을 뿐인데 벌써 안정적이고 예상되는 그와 그의 삶이 좋아졌다.

그의 루틴은 강박이 아닌 단단한 일상. 그야말로 퍼펙트 데이즈.

매일 같은 공원을 비슷한 시간에 산책하는 나는 그의 웃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행위예술을 하는 할아버지를 만나면 나오는 미소는 항상 비슷한 시간에 할아버지와 산책하는 당당한 강아지 당당이를 만나면 나오는 나의 미소와 같은 결이고, 하늘을 보며 찍는 사진은 매일 달라지는 하늘과 나무와 공기를 느끼며 걷는 나의 발과 같은 결이다.

 

영화의 배경은 최근이지만 일본 특유의 아날로그 감성 또한 루틴처럼 안정적인 예상을 가능하게 한다. 카세트테이프, 필름카메라, ‘문고판 100이라고 손 글씨로 적힌 오래된 개인 서점, 자판기, 지하상가.

그 개인과 개인이 등장하는 오래된 가게에서 안정감과 부러움을 느끼는 건 내가 급변하는 요즘을 따라가기 버겁기 때문이겠지?

예상되는, 최소한 진상은 아니라고 증명된 단골들 앞에서 즐겁게 노래하는 술집 여사장님의 웃음이 부러웠다.

 

영화 2시간 중 1시간 10분이 지나서야 영화의 다른 인물인 조카가 등장한다.

엄마와 싸워 가출해서 온 조카에게 항상 자던 잠자리를 양보한 그는 영화에서 처음으로 비질 소리가 들리기 전에 잠에서 깨어난다. 조카가 깰까 봐 조심조심 화분에 물을 주고, 출근 준비를 했지만 결국 일어난 조카와 함께 출근을 하고 루틴에 변화가 생긴다.

그는 그의 일상이 무너져서 당황했을까?

 

자판기 커피 2캔을 뽑아 들고, 역시나 카세트테이프로 노래를 들으며 도쿄 스카이트리를 지날 때 처음으로 지하상가의 가게가 아닌 인터넷상의 가게 이름이 등장한다.

일상뿐만 아니라 세계관의 변화가 시작되는 건가?

 

저 나무는 삼촌의 친구야?”

삼촌과 함께 공원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삼촌 옆에서 스마트폰으로 삼촌을 따라 나무-하늘 사진을 찍던 조카가 묻는다. 그리고 기꺼이 삼촌의 세계관에 발을 들인다.

루틴대로 살아가는 그의 단단한 일상에 조카가 들어왔다.

둘이 함께 자전거를 타고 목욕을 가고, 함께 단골 가게에서 저녁을 먹는다.

 

이 강을 따라가면 바다가 나와?

가볼까?

다음에.

다음에 언제?

다음은 다음이지. 지금은 지금이고.

다음은 다음.

지금은 지금.

다음은 다음.

지금은 지금.

 

지금은 지금이다. 퍼펙트 데이. 완벽한 지금.

 

조카는 돌아가고, 다시 일상이 복구된다.

함께 일하던 파트너가 갑자기 일을 그만두고 목욕도 못 갈 만큼 일이 늦어지기도 하고, 단골 가게 여사장의 전남편을 보고, 그래서 그림자를 겹치는 괴상한 다정함도 보이지만.

다시 복구될 단단한 일상이 있기에 일상은 복구되고, 그는 다시 비질 소리에 미소 지으며 깨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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