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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기원 나는 본래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작은 일에도 마음이 먼저 반응했고, 상황보다 감정이 앞섰다. 문제가 생기면 해결보다 상상이 먼저였고, 그 상상은 대개 최악의 방향으로 흘렀다. 그래서 세상은 늘 조금 과장되어 느껴졌다. 별일 아닌 것도 크게 다가왔고, 사소한 균열이 금방 전체를 흔들었다. 사람들은 그걸 예민하다고 불렀지만, 나는 그냥 그렇게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떠다니는 쪽의 인간. 엠블란스 소리를 처음 의식하게 된 것도 그 무렵이다. 새벽을 가르는 사이렌은 필요 이상으로 마음을 건드렸다. 잠을 깨우는 소리이면서 동시에, 어딘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신호 같았다. 괜히 창밖을 보게 만들고, 알 필요 없는 상상을 불러왔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 소리를 두고 “사람 살리는 소리”라고..
개늑시, 인간의 얼굴 오랜만에 여유로운 출근길. 느긋한 아침 식사를 하며 본 '개늑시'.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는 말은 원래 해 질 녘의 애매한 순간을 가리킨다. 빛과 어둠이 겹치고, 익숙한 것이 낯설어지는 시간. 나는 그 프로그램을 보며 그 말이 개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는 걸 자주 느낀다. 오히려 이 시간이 인간의 부족함을 더 잘 드러내는 것 같다. 프로그램 속 사연들 중 많은 경우는 비극이라기보다 방치에 가깝다. 조금만 관찰했으면, 조금만 공부했으면, 조금만 시간을 썼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이야기들. 사람들은 개를 문제라고 말하지만, 화면을 보면서 나는 자꾸 다른 것이 보인다. 환경을 설계하지 않은 인간, 자기 감정을 관리하지 못한 인간, 선택의 무게를 가볍게 여긴 인간. 개는 거의 문제가 없다. 그들은 개 종의 특성..
홋카이도에서 홋카이도에서 무릎까지 차오른 습기 없는 눈에 해가 비치면 세상이 애니메이션처럼 보인다. 한 뼘 간격으로 보석 같은 결정이 반짝거리고, 그 반짝임이 눈앞 공기에서도 느껴진다. 눈은 땅에만 쌓여 있는 게 아니라, 시선과 숨 사이에도 떠 있다. 시선을 조금 멀리 보내면 반사된 햇살에 새하얀 언덕이 드러나고, 어린 시절 TV 속에서만 보던 뽀로로 마을에 와 있음을 그제야 알게 된다. 현실인데, 기억처럼 보인다. 밟아본다. 교과서처럼 뽀드득 거린다. 발을 떼고 다시 내린다. 뽀드득. 같은 자리에 다시 발을 올려도 소리는 늘 조금씩 다르다. 눈이 계속 내리는 중인데도 발바닥 아래에서는 매번 새로운 저항이 느껴진다. 눌린 눈과 눌리지 않은 눈이 층을 만들고, 그 위에 내가 한 장 더 얹힌다. 눈 벽에 파묻혀 넓었던 ..
영화 〈어쩔수가없다〉 영화를 보고 나서 특별히 남는 건 없었다.정확히 말하면, 남기지 않으려는 영화처럼 보였다.넷플릭스에서 하나 보고 끄는 느낌.불편한데 화나지는 않고, 이해되는데 오래 생각나지는 않는다.연기는 역시 좋았고, 배우들은 많이 늙었다.나도 늙었고,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도 이미 여러 번 지나온 질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몇 문장만은 귀에 붙었다.“다 이뤘다.”“어쩔 수 없다.”“어쩔 수 없었다.”이 세 문장은 영화의 줄거리이자,요즘 우리가 세상을 설명할 때 가장 자주 쓰는 문법이다. 영화 초반, 주인공은 다 이뤘다고 말한다.집도 있고, 가족도 있고, 개도 있고, 직장도 있다.문제는 그 ‘이룸’이 너무 정돈돼 있다는 데 있다.삶이라기보다 이력서에 가깝다.칸이 정확히 채워져 있고, 여백이 없다.그래서 하나가 빠지는 ..
숨지 않는 사람들 생방송으로 진행된 업무보고를 보면서 묘한 감정이 들었다. 정치적 입장의 문제가 아니었다. 일의 태도에 대한 감정이었다. 화면 안에서 질문이 질문답게 오갔다. 답변이 미리 준비된 문장처럼 매끄럽지 않았다. 생각의 흔적이 말 사이로 튀어나왔고, 숫자를 찾느라 잠깐 멈칫하기도 했다. 이해되지 않는 대목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이 부분은 어떻게 된 겁니까?" 물음이 계속 이어졌고, 답하는 쪽도 모르는 건 모른다고 말했다. 그 솔직함이 화면을 통해 그대로 전달되는 순간, 오랜만에 '일하는 현장'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보고를 받는 쪽도, 하는 쪽도 서로를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수 없었다. 생방송이라는 형식은 사실 쌍방에게 불리하다. 질문하는 쪽도 실수할 수 있고, 답하는 쪽도 준비 안 된 모습이..
의사결정은 합리적인가 카페에서 메뉴를 고를 때가 있다. 아메리카노, 라떼, 에스프레소. 논리적으로 따지자면 가격, 칼로리, 카페인 함량을 비교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지난번 마셨던 것, 지금 기분, 눈에 먼저 들어온 것으로 정한다. 그런데 실제 삶에서 사람들이 결정하는 방식을 보면, 제한된 합리성이라는 말조차 다소 친절하게 느껴진다. 친구는 6개월 동안 강아지를 키울지 고민했다. 노트에 장단점을 적었다. 키우고 싶은 이유는 열여덟 가지, 망설여지는 이유는 스물세 가지였다. 만날 때마다 같은 말을 했다. "키우고 싶은데, 시간이 없어." 그러다 주말에 보호소를 찾았다. 한 마리가 다가와 손을 핥고 눈을 마주쳤다. 3초였다. 6개월의 고민이 그 순간 정리되었다. 고민한다는 것과 결정을 미룬다는 것은 다르다. 친구의 노트에 적..
말 않던 시간 먼저 연락하는 쪽은 대체로 정해져 있다. 답장이 늦어도 괜찮은 사람이 있고, 늦으면 마음이 먼저 무거워지는 사람이 있다. 같은 관계 안에 있어도 누군가는 더 자주 생각하고, 누군가는 더 늦게 반응한다. 관계는 처음부터 같은 무게로 놓이지 않는다. 이 불균형은 낯설지 않다. 대부분의 관계는 약간 기운 채로 시작한다. 공평한 출발은 오히려 예외에 가깝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의 기울어짐을 문제 삼지 않는다. 성향의 차이라고 넘기고, 시간이 지나면 익숙함이라는 말로 덮는다. 문제는 각도가 고정될 때 시작된다. 관계가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순간은 기울어짐이 생겼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각도가 시간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을 때다. 역할이 굳어진 관계는 사람의 중심을 조금씩 흔든다. 항상 먼저 연락하는 사람, 늘 이해..
진격의 거인 Episode 94 이후, 끝내 남은 벽에 대하여 넷플릭스에서 94화를 시작한다는 건 가벼운 클릭이 아니다. “거기까지 가면 끝까지 간 거다.” 농담 같은 말이었지만, 오타쿠 특유의 과장된 확신과 이 작품을 둘러싼 팬덤의 밀도가 묘하게 겹쳐 들렸다. 첫 화를 재생하는 순간, 나는 그 말이 왜 나왔는지 조금은 알게 되었다. 이 세계는 들어가는 건 쉽지만 빠져나오는 건 어렵게 설계된 이야기였다. 이야기는 거대한 벽 안에서 시작된다. 벽 밖에는 인간을 잡아먹는 거인들이 있고, 사람들은 백 년 넘게 그 벽 안에서 두려움과 함께 살아왔다. 주인공 엘런은 어린 시절, 벽을 넘어온 거인에게 어머니를 잃는다. “이 세상에서 거인을 한 마리도 남김없이 구축하겠다.” 복수와 자유를 향한 이 절규가, 긴 여정의 시작이 된다. 하지만 이야기는 인간과 거인의 단순한 충돌로 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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