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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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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으로 넘어간 것들 읽을 책을 적어두는 목록이 있다. 그 안에 있던 한 권을 선물받았다. 『그랬다고 적었다』.내가 걸어가던 방향으로 길이 한 칸 더 깔린 기분이었다. 그 마음까지 펼쳐보지는 않고 그냥 읽었다. 오랜만의 종이책이었다. 밤이 깊어지자 글자가 가라앉았다. 패드는 스스로 빛나는데 종이는 그러지 못한다. 등을 하나 더 켰다. 글자가 돌아왔다. 책이 빛을 달라고 했고, 나는 그 부탁이 싫지 않았다. 얇은 책이라 금세 읽혔다. 오른손에 쥔 두께가 한 장씩 왼손으로 옮겨갔다. 전자책은 이런 걸 알려주지 않는다. 지나온 만큼이 손바닥 아래에 쌓였다.그런데 생각은 가지런히 넘어가지 않았다. 처음 걸린 건 '나'였다.'진짜 나답게'라는 말이 사방에 붙은 시대에, 김애란작가는 나를 더 짙게 하자고 하지 않는다. 묽게 하자고 한다..
사람을 네 개의 숫자로 나눈 뒤 우연히 유튜브에서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를 봤다. 시작이 좋았다. 정치, 젠더, 계급, 개방성. 사람을 네 개의 축으로 나누고 다시 숫자를 붙였다. 정치는 좌파와 우파, 젠더는 페미니즘과 이퀄리즘, 계급은 서민과 부유, 개방성은 개방과 전통. 이퀄리즘은 페미니즘에 동의하지 않는 쪽이 스스로를 설명하기 위해 가져온 말이었다. 각 축에는 다시 1에서 3까지 숫자가 붙어 그 성향이 얼마나 뚜렷한지를 표시했다. 한 사람이 그렇게 네 개의 단어와 네 개의 숫자가 된다. 권성민 PD는 이 방식이 MBTI와 닮았다고 했다. 익숙한 틀이니 사람을 빠르게 파악하기에는 편했을 것이다. 참가자들은 상대의 코드를 정확히 알아내면 그 사람을 탈락시킬 수도 있고, 그들 사이에는 공동체를 흔드는 임무를 받은 ‘불순분자’도 ..
가장 완벽한 환영 팸플릿을 처음 받아 들었을 때, 표지에서 손이 멈췄다. 한 노인이 액자 속 아기에게 손을 내미는 장면이었는데,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본능처럼 손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시간의 앞과 뒤를 한 화면에 담아놓은 것 같았다. 건널 수 없는 경계가 분명히 있는데도 사람은 자꾸 그 거리를 잊는다. 어쩌면 환영이란 눈을 속이는 기술이 아니라, 닿지 않는 것을 향해 손을 내밀게 만드는 어떤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가까이 다가가면 얼굴은 사라지고 점만 남는데, 몇 걸음 물러서는 순간 흩어졌던 것들이 다시 하나의 얼굴이 되고 눈빛이 된다. 작품은 가만히 있는데 움직이는 것은 늘 관람객이었다. 그림을 감상했다기보다, 그림과 거리를 협상하는 시간이었다. 요즘은 주름 하나에 쉽게 놀라지 않는다. AI가 몇 초 만에 만..
상자 앞에 선 사람들 〈상자 속의 양〉을 보고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고글을 낀 채 죽은 가족을 만나는 사람을 보았다. 화면 속 그는 허공에 손을 뻗고 있었다. 오래 보지 못하고 채널을 돌렸다. 보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그 마음을 영상과 목소리로 다시 불러 세우는 일이 어딘가 폭력처럼 느껴졌다. 죽은 사람을 두 번 데려오는 것 같았다. 그래서 〈상자 속의 양〉 앞에서 잠깐 망설였다. 죽은 아이를 AI로 되살린다는 영화. 또 그 고글 같은 이야기일까. 그래도 극장에 갔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니까. 이 사람은 AI를 찍어도 결국 가족을 찍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이를 통해 가족을 보고, 가족을 통해 그 가족이 놓인 사회를 보는 사람. 맞았다. 그런데 내가 틀린 것도 있었다. 영화는 드론이 상자를 배달하며 시작한다. 하늘에서 상자가 내려온다. 7살 아들을 ..
영화〈결혼 이야기〉 — 사랑이 형태를 바꾸는 과정 https://www.youtube.com/watch?v=TW8IaLXvOgk&list=RDTW8IaLXvOgk&start_radio=1 AI가 권했다. 노아 바움백의 〈결혼 이야기〉, 2019년작. 봄비인지 아닌지, 창에 얇게 붙었다 사라지는 비가 온다. 환절기라 인후염 약을 먹고 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다. 영화는 두 개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찰리는 니콜이 가위 한 자루로 온 가족의 머리를 잘라내는 재주를, 남들이 민망해할 일을 편안하게 해주는 능력을, 누가 말할 때 때로는 지나치게 오래 들어주는 버릇을 말한다. 니콜은 찰리가 영화를 보다 쉽게 운다는 것, 남의 얼굴에 음식이 묻었을 때 상대가 민망하지 않도록 알려주는 방식, 옷을 잘 입는다는 것, 주변 사람들로 새로운 가족을 빚어내는 재주를 말한다..
이역만리에서 온 영화 한 편 「은교」 멀리서 영화 한 편을 보내왔다. 이역만리, 중국에서. 메시지는 짧았다."혹시 영화 은교 보셨나요?"안 봤다고 했다. 그랬더니 돌아온 말."혹시 괜찮으면 한번 봐봐요."〈은교〉를 아무한테나 편하게 권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봤다. 혼자, 밤에. 억누르고 있지만 사라지지 않는 감정. 가져선 안 될 것 같지만 자꾸 손이 가는 마음. 그게 이 영화라는 걸 보내준 사람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영화는 천천히 시작된다.일흔 살의 시인 이적요. 그의 마당에 어느 날 열일곱 소녀 은교가 들어온다. 담을 넘다가, 그냥 우연히. 아무 의도 없이. 그런데 이적요에게 그 우연은 오래 잠들어 있던 무언가를 깨우는 소리였다.그는 은교를 바라본다. 오래, 너무 오래. 그리고 시를 쓴다.영화를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
영화 〈어쩔수가없다〉 영화를 보고 나서 특별히 남는 건 없었다.정확히 말하면, 남기지 않으려는 영화처럼 보였다.넷플릭스에서 하나 보고 끄는 느낌.불편한데 화나지는 않고, 이해되는데 오래 생각나지는 않는다.연기는 역시 좋았고, 배우들은 많이 늙었다.나도 늙었고,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도 이미 여러 번 지나온 질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몇 문장만은 귀에 붙었다.“다 이뤘다.”“어쩔 수 없다.”“어쩔 수 없었다.”이 세 문장은 영화의 줄거리이자,요즘 우리가 세상을 설명할 때 가장 자주 쓰는 문법이다. 영화 초반, 주인공은 다 이뤘다고 말한다.집도 있고, 가족도 있고, 개도 있고, 직장도 있다.문제는 그 ‘이룸’이 너무 정돈돼 있다는 데 있다.삶이라기보다 이력서에 가깝다.칸이 정확히 채워져 있고, 여백이 없다.그래서 하나가 빠지는 ..
진격의 거인 Episode 94 이후, 끝내 남은 벽에 대하여 넷플릭스에서 94화를 시작한다는 건 가벼운 클릭이 아니다. “거기까지 가면 끝까지 간 거다.” 농담 같은 말이었지만, 오타쿠 특유의 과장된 확신과 이 작품을 둘러싼 팬덤의 밀도가 묘하게 겹쳐 들렸다. 첫 화를 재생하는 순간, 나는 그 말이 왜 나왔는지 조금은 알게 되었다. 이 세계는 들어가는 건 쉽지만 빠져나오는 건 어렵게 설계된 이야기였다. 이야기는 거대한 벽 안에서 시작된다. 벽 밖에는 인간을 잡아먹는 거인들이 있고, 사람들은 백 년 넘게 그 벽 안에서 두려움과 함께 살아왔다. 주인공 엘런은 어린 시절, 벽을 넘어온 거인에게 어머니를 잃는다. “이 세상에서 거인을 한 마리도 남김없이 구축하겠다.” 복수와 자유를 향한 이 절규가, 긴 여정의 시작이 된다. 하지만 이야기는 인간과 거인의 단순한 충돌로 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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