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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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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엔이 오른 사이 음악이 먼저 들린다. 익숙한 선율과 함께 신주쿠의 밤거리가 화면을 지나간다. 사람들이 하루를 마칠 무렵 자신의 하루는 시작된다는 마스터의 낮은 내레이션. 얼마 만에 듣는 목소리인가. 2026년 10월, 《심야식당》이 돌아왔다. 7년 만의 시즌 6이다. 누군가에게는 오랜 기다림이었겠지만, 내게는 뜻밖이었다. 한동안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철길 아래 지하도, 좁은 골목의 작은 식당. 그 길을 나는 걸어본 적이 있다. 2023년 2월 말부터 3월 초까지 도쿄에 있었다. 신주쿠의 골든가이와 오모이데요코초를 걸었고, 그 지하도도 지났다. 어디가 어디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돌아다녔다. 나는 심야식당의 팬은 아니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꽤 여러 이야기를 보았고, 손님들이 남기고 간 사연도 기억한다. 그때 ..
왼쪽으로 넘어간 것들 — 김애란 『그랬다고 적었다』를 읽고 읽을 책을 적어두는 목록이 있다. 그 안에 있던 한 권을 선물받았다. 『그랬다고 적었다』.내가 걸어가던 방향으로 길이 한 칸 더 깔린 기분이었다. 그 마음까지 펼쳐보지는 않고 그냥 읽었다. 오랜만의 종이책이었다. 밤이 깊어지자 글자가 가라앉았다. 패드는 스스로 빛나는데 종이는 그러지 못한다. 등을 하나 더 켰다. 글자가 돌아왔다. 책이 빛을 달라고 했고, 나는 그 부탁이 싫지 않았다. 얇은 책이라 금세 읽혔다. 오른손에 쥔 두께가 한 장씩 왼손으로 옮겨갔다. 전자책은 이런 걸 알려주지 않는다. 지나온 만큼이 손바닥 아래에 쌓였다.그런데 생각은 가지런히 넘어가지 않았다. 처음 걸린 건 '나'였다.'진짜 나답게'라는 말이 사방에 붙은 시대에, 김애란작가는 나를 더 짙게 하자고 하지 않는다. 묽게 하자고 한다..
사람을 네 개의 숫자로 나눈 뒤 우연히 유튜브에서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를 봤다. 시작이 좋았다. 정치, 젠더, 계급, 개방성. 사람을 네 개의 축으로 나누고 다시 숫자를 붙였다. 정치는 좌파와 우파, 젠더는 페미니즘과 이퀄리즘, 계급은 서민과 부유, 개방성은 개방과 전통. 이퀄리즘은 페미니즘에 동의하지 않는 쪽이 스스로를 설명하기 위해 가져온 말이었다. 각 축에는 다시 1에서 3까지 숫자가 붙어 그 성향이 얼마나 뚜렷한지를 표시했다. 한 사람이 그렇게 네 개의 단어와 네 개의 숫자가 된다. 권성민 PD는 이 방식이 MBTI와 닮았다고 했다. 익숙한 틀이니 사람을 빠르게 파악하기에는 편했을 것이다. 참가자들은 상대의 코드를 정확히 알아내면 그 사람을 탈락시킬 수도 있고, 그들 사이에는 공동체를 흔드는 임무를 받은 ‘불순분자’도 ..
가장 완벽한 환영 팸플릿을 처음 받아 들었을 때, 표지에서 손이 멈췄다. 한 노인이 액자 속 아기에게 손을 내미는 장면이었는데,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본능처럼 손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시간의 앞과 뒤를 한 화면에 담아놓은 것 같았다. 건널 수 없는 경계가 분명히 있는데도 사람은 자꾸 그 거리를 잊는다. 어쩌면 환영이란 눈을 속이는 기술이 아니라, 닿지 않는 것을 향해 손을 내밀게 만드는 어떤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가까이 다가가면 얼굴은 사라지고 점만 남는데, 몇 걸음 물러서는 순간 흩어졌던 것들이 다시 하나의 얼굴이 되고 눈빛이 된다. 작품은 가만히 있는데 움직이는 것은 늘 관람객이었다. 그림을 감상했다기보다, 그림과 거리를 협상하는 시간이었다. 요즘은 주름 하나에 쉽게 놀라지 않는다. AI가 몇 초 만에 만..
상자 앞에 선 사람들 〈상자 속의 양〉을 보고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고글을 낀 채 죽은 가족을 만나는 사람을 보았다. 화면 속 그는 허공에 손을 뻗고 있었다. 오래 보지 못하고 채널을 돌렸다. 보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그 마음을 영상과 목소리로 다시 불러 세우는 일이 어딘가 폭력처럼 느껴졌다. 죽은 사람을 두 번 데려오는 것 같았다. 그래서 〈상자 속의 양〉 앞에서 잠깐 망설였다. 죽은 아이를 AI로 되살린다는 영화. 또 그 고글 같은 이야기일까. 그래도 극장에 갔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니까. 이 사람은 AI를 찍어도 결국 가족을 찍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이를 통해 가족을 보고, 가족을 통해 그 가족이 놓인 사회를 보는 사람. 맞았다. 그런데 내가 틀린 것도 있었다. 영화는 드론이 상자를 배달하며 시작한다. 하늘에서 상자가 내려온다. 7살 아들을 ..
영화〈결혼 이야기〉 — 사랑이 형태를 바꾸는 과정 https://www.youtube.com/watch?v=TW8IaLXvOgk&list=RDTW8IaLXvOgk&start_radio=1 AI가 권했다. 노아 바움백의 〈결혼 이야기〉, 2019년작. 봄비인지 아닌지, 창에 얇게 붙었다 사라지는 비가 온다. 환절기라 인후염 약을 먹고 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다. 영화는 두 개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찰리는 니콜이 가위 한 자루로 온 가족의 머리를 잘라내는 재주를, 남들이 민망해할 일을 편안하게 해주는 능력을, 누가 말할 때 때로는 지나치게 오래 들어주는 버릇을 말한다. 니콜은 찰리가 영화를 보다 쉽게 운다는 것, 남의 얼굴에 음식이 묻었을 때 상대가 민망하지 않도록 알려주는 방식, 옷을 잘 입는다는 것, 주변 사람들로 새로운 가족을 빚어내는 재주를 말한다..
이역만리에서 온 영화 한 편 「은교」 멀리서 영화 한 편을 보내왔다. 이역만리, 중국에서. 메시지는 짧았다."혹시 영화 은교 보셨나요?"안 봤다고 했다. 그랬더니 돌아온 말."혹시 괜찮으면 한번 봐봐요."〈은교〉를 아무한테나 편하게 권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봤다. 혼자, 밤에. 억누르고 있지만 사라지지 않는 감정. 가져선 안 될 것 같지만 자꾸 손이 가는 마음. 그게 이 영화라는 걸 보내준 사람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영화는 천천히 시작된다.일흔 살의 시인 이적요. 그의 마당에 어느 날 열일곱 소녀 은교가 들어온다. 담을 넘다가, 그냥 우연히. 아무 의도 없이. 그런데 이적요에게 그 우연은 오래 잠들어 있던 무언가를 깨우는 소리였다.그는 은교를 바라본다. 오래, 너무 오래. 그리고 시를 쓴다.영화를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
영화 〈어쩔수가없다〉 영화를 보고 나서 특별히 남는 건 없었다.정확히 말하면, 남기지 않으려는 영화처럼 보였다.넷플릭스에서 하나 보고 끄는 느낌.불편한데 화나지는 않고, 이해되는데 오래 생각나지는 않는다.연기는 역시 좋았고, 배우들은 많이 늙었다.나도 늙었고,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도 이미 여러 번 지나온 질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몇 문장만은 귀에 붙었다.“다 이뤘다.”“어쩔 수 없다.”“어쩔 수 없었다.”이 세 문장은 영화의 줄거리이자,요즘 우리가 세상을 설명할 때 가장 자주 쓰는 문법이다. 영화 초반, 주인공은 다 이뤘다고 말한다.집도 있고, 가족도 있고, 개도 있고, 직장도 있다.문제는 그 ‘이룸’이 너무 정돈돼 있다는 데 있다.삶이라기보다 이력서에 가깝다.칸이 정확히 채워져 있고, 여백이 없다.그래서 하나가 빠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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