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어쿠스틱수다

(92)
영화〈결혼 이야기〉 — 사랑이 형태를 바꾸는 과정 https://www.youtube.com/watch?v=TW8IaLXvOgk&list=RDTW8IaLXvOgk&start_radio=1 AI가 권했다. 노아 바움백의 〈결혼 이야기〉, 2019년작. 봄비인지 아닌지, 창에 얇게 붙었다 사라지는 비가 온다. 환절기라 인후염 약을 먹고 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다. 영화는 두 개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찰리는 니콜이 가위 한 자루로 온 가족의 머리를 잘라내는 재주를, 남들이 민망해할 일을 편안하게 해주는 능력을, 누가 말할 때 때로는 지나치게 오래 들어주는 버릇을 말한다. 니콜은 찰리가 영화를 보다 쉽게 운다는 것, 남의 얼굴에 음식이 묻었을 때 상대가 민망하지 않도록 알려주는 방식, 옷을 잘 입는다는 것, 주변 사람들로 새로운 가족을 빚어내는 재주를 말한다..
당연한 것이 무너지는 순간 오늘 아침, 한 남자가 전쟁의 경과를 보고했다. 핵심 전략 목표가 거의 완수되었다고 했다. 해군은 소멸되었고, 미사일 생산 능력은 파괴되었으며, 곧 끝날 것이라고 했다. 그 직전에 그는 휴전을 거부했다. 상대를 완전히 소멸시키고 있는 중에 휴전은 하지 않는다, 는 것이 이유였다. 그 문장은 논리적으로 완결되어 있었다.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전쟁은 항상 설명과 함께 온다. 역사적 맥락, 안보 논리, 동맹 구조, 에너지 이권. 설명이 정교할수록 죽음은 점점 더 납득 가능한 것처럼 다루어진다. 그 납득의 과정이, 사실은 가장 위험한 일이다. 작전명이 붙고, 목표가 번호를 달고, 진척률이 백분율로 환산되는 순간, 전쟁은 프로젝트가 된다. 프로젝트에는 비극이 없다. 지연과 초과 비용만 있을 뿐이다. 나는 전쟁을..
몽글몽글, 그냥 사람 얘기 남의 연애 이야기를 듣는 건 언제나 흥미롭다. 그 옛날 사랑의 스튜디오부터 돌싱, 이제는 부모님까지 함께 나오는 합숙 연애 프로그램까지 있을 정도다. 허용된 관음과 뒷담화는 은근한 우울감과 결속을 강화해 도파민을 배출시킨다.그래서 이효리의 몽글상담소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땐 다소 실망감을 금치 못했다. 마치 빈곤 포르노처럼 약자에게서 어떤 도파민을 탈취하려고 하는지.내가 틀렸다. 몽글상담소는 다르다.이건 도파민이 아니라 온도다. 따뜻한 데 오래 앉아있으면 일어나기 싫은 것처럼, 자극이 아니라 온기가 우리를 붙잡는다.그 온기가 어디서 오는지 처음엔 몰랐다. 발달장애인이 화면에 등장한 적이 없었던 건 아니다.〈말아톤〉이 있었고, 〈굿닥터〉가 있었다. 근데 그 자리엔 늘 보호자가 옆에 있었거나, 천재적인 능력이..
러시아가 한국을 바라보는 계산 「북극에서 울산까지」 러시아에게 북극은 낭만적인 얼음의 세계가 아니다. 그곳은 러시아 경제의 미래가 걸린 자원의 공간이다. 러시아 북극 전략에 따르면 자국 천연가스의 상당 부분이 북극권에서 생산되고 있으며, 야말(Yamal)과 같은 LNG 프로젝트 역시 이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북극은 러시아에게 새로운 변방이 아니라 국가 경제의 중심이 이동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자원만으로 경제가 움직이지는 않는다. 자원에는 언제나 두 번째 질문이 따라붙는다. 어디로 팔 것인가. 오랫동안 러시아 에너지의 가장 큰 시장은 유럽이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과 서방 제재 이후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유럽은 더 이상 안정적인 시장이 아니며, 러시아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러시아의 에너지 전략은 자연스럽게 방향을 바꾸고 있다. 유럽..
이역만리에서 온 영화 한 편 「은교」 멀리서 영화 한 편을 보내왔다. 이역만리, 중국에서. 메시지는 짧았다."혹시 영화 은교 보셨나요?"안 봤다고 했다. 그랬더니 돌아온 말."혹시 괜찮으면 한번 봐봐요."〈은교〉를 아무한테나 편하게 권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봤다. 혼자, 밤에. 억누르고 있지만 사라지지 않는 감정. 가져선 안 될 것 같지만 자꾸 손이 가는 마음. 그게 이 영화라는 걸 보내준 사람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영화는 천천히 시작된다.일흔 살의 시인 이적요. 그의 마당에 어느 날 열일곱 소녀 은교가 들어온다. 담을 넘다가, 그냥 우연히. 아무 의도 없이. 그런데 이적요에게 그 우연은 오래 잠들어 있던 무언가를 깨우는 소리였다.그는 은교를 바라본다. 오래, 너무 오래. 그리고 시를 쓴다.영화를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
우리는 자라지만, 달라지지는 않는다 국민학교와 중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참 다양한 친구들이 있었다. 착한 아이, 약삭빠른 아이, 괜히 큰소리만 치던 아이, 뒤에 숨어 책임을 피하던 아이, 앞과 뒤가 달랐던 아이. 그때는 그저 철없는 시절의 모습이라 여겼다.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되면 다들 비슷해질 거라고, 자연스럽게 성숙해질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살아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서 묘한 기시감이 반복된다. 모두가 사회적 역할과 이해관계를 지닌 어른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조금만 시간을 두고 보면 어린 시절 교실에서 보았던 그 모습들이 형태만 바뀐 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앞에 나서던 아이는 여전히 중심에 서는 자리를 찾고, 눈치를 보던 아이는 여전히 상황을 재며 움직..
투표장을 향하는 얼굴 투표를 안 하는 사람에게 왜 안 가냐고 물으면 대답은 대개 같다.어차피 다 똑같아. 이 말은 귀찮다는 뜻이 아니다.여러 번 기대했다가, 여러 번 실망했고, 그래서 더 기대하지 않기로 마음을 정리한 뒤에 나오는 말이다.무관심이 아니라 정리다. 마음을 접은 상태. 그래서 어떤 사람은 아예 가지 않는다.가봤자 달라지는 게 없다는 느낌이 이미 몸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한 번도 안 가본 사람이 아니라, 가본 사람에게서 더 자주 나오는 태도다. 반대로 투표장까지 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놀라울 만큼 비슷하다.대단한 결심을 한 표정이 아니다.장 보러 나온 사람처럼, 그날 해야 할 일을 하러 온 얼굴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는 전혀 다른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 누군가는 마음이 걸려서 간다.좋아서가 아니라, 그냥 놔두면 내가..
나의 메모리 카드 집중하다 보면 문득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리는 때가 있다. 생각이 안 나는 게 아니라, 더 이상 집어넣을 자리가 없어서 생기는 과부하에 가깝다. 아이디어는 문밖에서 서성거리는데, 머릿속엔 '메모리 부족'이라는 무심한 경고등만 반복해서 뜨는 요즘이다. 이 감각의 시작은 의외로 아주 조용했다.나란히 앉아 시간을 보내다 우연히 마주친 사진 몇 장. 이미 지워진 줄 알았던 그 장면들을 곁에 있는 이가 조용히 꺼내 보여주었다. 오래전 함께 보냈던 시간들. 그때는 모든 게 새로워서 더 날카롭게 설렜던 순간들이다. 사진은 낡았는데 그걸 바라보는 마음은 이상할 만큼 생생했다. 요즘처럼 설렐 일이 드문 시기라 그런지, 그 찰나의 장면이 생각보다 깊은 자국을 남겼다. 그 설렘이 나를 과거 쪽으로 슬쩍 밀어냈다.아주 오랜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