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09) 썸네일형 리스트형 문틈의 기척 머릿속에는 문이 많다.서로에게 기대어 미세하게 뒤틀린 문들.어디에도 완전히 닿지 못한 상태로바람이 스치면 제각기 다른 떨림을 흘린다. 문 하나에 손끝이 닿으면가장 먼 문이 먼저 숨을 고르고,열리지도 닫히지도 않은 기척이내 안쪽으로 번져온다.생각은 나에게서 시작되는 듯하다가도틈의 어둠이 먼저 나를 읽어낼 때가 있다. 반쯤 열린 사이로빛과 어둠이 서로의 가장자리를 잡아당기며 흐른다.그 흐름이 어디로 닿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오히려 나를 잠시 평온하게 비워놓는다. 나는 그 경계를 넘지 않는다.넘고 싶은 욕망이 없어서가 아니라,아직 방향을 다 말하고 싶지 않아서.문틈에서 흘러나오는 숨을 듣는 동안내 쪽에서도 아주 미세한 떨림이그 틈에 닿는다. 가끔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다.문 앞에 서지 않는 사람들.복도를 걷.. 물웅덩이에 비친 하늘 – 영화 ‘로마’를 보고 첫 장면은 바닥이다. 누군가 타일을 닦고 있고, 물이 고이고, 그 위로 하늘이 비친다.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는다. 알폰소 쿠아론의 2018년 작 로마. 감독이 어린 시절을 보낸 멕시코시티 콜로니아 로마를 배경으로, 가정부 클레오가 살아낸 일 년의 시간을 따라가는 영화다. 이 이야기는 멀리서 꾸민 서사가 아니라, 감독의 실제 가정부였던 리보라는 인물을 바탕으로 한 기억의 기록이다. 흑백이라는 게 이상하다. 색이 없는데 색감이 다채롭다. 더러움과 깨끗함이 선명하다. 상류와 하층이 한 화면 안에서 숨 쉰다. 색채가 사라지자 장면들은 더 투명해지고, 감정은 덜 흔들리고, 관계의 결은 더 또렷해진다. 흑백은 색을 빼는 방식이 아니라 관계를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클레오는 조용하다. 아이들을 돌보고, 빨래를 하고, .. 인적 쇄신 이건 감정의 언어가 아니라 권력의 언어다.사람을 자르는 얘기가 아니라 사람을 다시 세우는 일이다.진짜 쇄신은 교체가 아니라 회복이니까.그러나 사람을 바꾸는 일보다 마음을 바꾸는 일이 더 어렵다. 인적 쇄신은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적용해야 하는 매우 어려운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적쇄신이라는 말은 늘 타인을 겨냥한다. 그러나 진짜 쇄신은 오래된 나를 내보내는 일에서 시작된다. 선택적 저항이라는 말이 있다. 좋은 정책에는 협조하고 나쁜 정책에는 비협조한다는 뜻이다.그러나 이정도면 다행이다. 지금 일어나는 선택적 저항은 그렇지 않다. 나의 영리와 라인, 나의 조직 안위를 위해 존재한다. 그 조직이 국민을 위해 일하는 조직이라도 그렇다. 어느 부서의 과장이 있다. 그는 정책의 옳고 그름.. 오르골 그림자 낮엔 무지갯빛이었다.햇살이 바뀌자, 관람차 오르골은 벽 위에 다른 얼굴을 남겼다.한때는 음악이 돌고, 빛이 흩어졌다.지금은 멈췄다.소리도, 회전도 없다.남은 건 오직 그림자 하나.나는 그 그림자를 오래 바라본다.빛은 빠르고 변덕스럽다.아침이면 길게 늘어지고, 한낮엔 쪼그라들고, 저녁엔 사라진다.그림자는 그런 변화를 담담하게 받아들인다.빛이 가는 대로 모양을 바꾸되,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킨다.말도 없고 얼굴도 없지만, 모든 것을 그대로 베껴 산다.묘하게 충성스럽다.감정이 흐려질 땐 관찰이 유일한 구명줄이다.뭔가를 자세히 본다는 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신호다.색이 사라지니 형태가 드러난다.그림자는 빛보다 솔직하다. 적절한 낱말 가수 성시경이 일본 음식을 소개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면을 입에 넣고 한참을 씹더니 그가 말했다. "치아가 면을 끊는 순간의 저항감." 그냥 "쫄깃하다"고 해도 되는데, 그는 자신이 느낀 것을 정확하게 포착하려 애썼다.더 인상적이었던 건 그 다음이었다. 그는 요리사가 아님에도 음식의 역사, 육수를 내는 방식, 지역마다 다른 면의 두께까지 일본 음식을 모르는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찬찬히 설명했다.그 장면을 보며 생각했다. 이런 게 진짜 소통이구나. 자신이 경험한 것을 상대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옮겨내는 일. 나는 여러 유형의 사람들을 만나며 소통한다.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인다는 전제 아래에서도, 같은 주제를 놓고 나누는 대화의 밀도는 천차만별이다. 어떤 대화는 물 위를 스치듯 겉만 맴돈다... 문턱에 선 듯 불안감을 주는 AGI 어느 날 문득, 내가 서 있는 땅이 움직이고 있다는 걸 느꼈다. 조용하지만 거대하게, 천천히 보이지만 실은 맹렬하게. AGI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변화 앞에서 나는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낯선 두려움을 느낀다. 챗GPT가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그저 신기한 도구쯤으로 여겼다. 뉴스에서 AI가 언급될 때마다 '그런가 보다' 했고, 자율주행차나 주식 시장의 변동 정도로만 이해했다. 그러나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도구가 되면서, 이것이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전문가의 영역에서 우리 일상으로 스며들어온 이 힘은 지금까지의 모든 틀을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AGI 시대가 온다고 한다. 그것도 곧.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해결하는 범용 인공지능. 전문가들은 말한.. 금목서 일본 어느 사찰 가는 길에서 처음 만났던 금목서. 은목서도 함께 피어 있었다. 그때는 그저 지나쳤다. 내 코끝을 스친 것이 기억의 뿌리를 내릴 줄은 몰랐다. 이제 금목서는 숨은 무언가를 찾는 놀이처럼 나에게 온다. 낙엽이 떨어진 공원길, 어디쯤에선가 향기가 먼저 손을 내민다. 나는 멈춘다.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어린아이처럼, 보물찾기하듯. 보이지 않는 한 그루가 이토록 넓게 제 몸을 푼다는 게 신기하다. 향기는 방향을 갖지 않는다.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데 어디에나 있다. 머릿속 구겨진 생각들의 주름 사이로 스며들어 주름을 편다. 그 순간만큼은 다른 것들이 멀어진다. 가을임에도 노랗지도 빨갛지도 못한 단풍이 그냥 누런빛으로 떨어진다. 흐리고 비 오는 날들이 물들 시간을 주지 않았다. 강변도 공원도 아.. 시간이 쌓이는 방식 - '은중과 상연’ 긴 연휴에 넷플릭스를 켰다. '은중과 상연'. 아역배우 연기가 좋다는 말에 시작한 몰아보기는 오래 이어졌다. 이 드라마는 1990년대 초등학교에서 만난 두 소녀가 마흔을 넘기기까지, 삼십 년의 시간을 가로지른다. 류은중과 천상연. 두 사람은 친구였다. 동경하고, 질투하고, 사랑하고, 헤어졌다. 함께 웃고 울고, 서로를 베고, 다시 만나고 헤어졌다. 사랑이 구원이 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시점이 바뀐다. 은중에서 상연으로. 화자가 바뀌면 같은 장면이 다르게 보인다. 방금 전까지 이해했다고 생각한 장면이 다른 인물의 목소리로 다시 들리면 가슴이 조여든다. 이런 기법을 쓰려면 배짱이 있어야 한다. 잘못하면 산만해지고, 자칫하면 기교만 남는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확신에 차 있다. 초반의 축은 상연 남매다. 상연.. 이전 1 2 3 4 ··· 1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