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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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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 계절이 바뀌고 옷을 정리할 때면 버려도 버려도 버릴 옷이 꼭 나온다. 이건 2년간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이고, 이건 이제 목이 다 늘어지고 작아졌다. 한번 산 볼펜은 끝까지 쓴다.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일이 적고 싫증나는 법이 없다. 물건을 사기 전에는 어디에 넣을지가 먼저 고민된다. 물건이 나와 있거나, 같은 물건이 쌓여 있으면 마음이 불편하다. 확인하고 처리한 이메일과 문자는 삭제해야 되고, 그건 컴퓨터 바탕 화면도 마찬가지다. 내가 가진 물건이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고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 뭐든 넘치는 건 부담스럽다. 심지어 인간관계까지도. 이런 내가 참 까탈스럽다고 생각되었는데, 나를 지칭하는 말을 찾았다. 미니멀리스트. 다행이다. 심지어 이제는 단순한 삶이 칭찬받기도 하고, 미니멀라이프,..
어쩌고 저쩌고 태풍 걱정 연일 제 6호 태풍 카눈이 북상한다는 뉴스가 나온다. 일본을 거처 온 이놈은 가고시마현에 제법 피해를 준 모양이다. 큰 거실 창문이 앞뒤로 덜렁거리는 경험을 몇 번 하고 나니 이런 소식을 들으면 집을 둘러보게 된다. 그리고 가족들, 지인들의 안부가 걱정된다. 문이라도 단단히 잠그고 있으라고 말해주고 싶고 출근은 무슨, 안전이 최우선이지 하며 말리고 싶어지고 당연히 나오라는 회사에 같이 욕 해주고 싶다. 가까워진 태풍 탓인지 온도가 4~5도 낮아지고 강한 바람이 불어서 그런지 그리 덥지 않다. 태풍이 다가온다는 뉴스를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이런 날에는 어디를 가나 사람이 많지 않다. 식당도 카페도, 나의 공간들도. 나는 아주 당당하게 태풍을 핑계로 반바지에 긴팔티를 입고 슬리퍼를 끌고 출근했다. 그리고 ..
성공한 덕후 요즘 CBS 라디오 이강민의 잡지사를 듣는 재미가 즐겁다. 잡지사에는 그야말로 잡다한 지식. 잡지처럼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나와서 얇고도 넓은 지식을 재미있게 알려주고 있는데, 내가 전혀 관심이 없고, 생각지도 않았던 분야도 어찌나 재미있게 접근시켜 주는지 표현하는 능력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이미 재미있는 강의로 잘 알려진 역사 스토리텔러 박광일 작가나 과학 분야 곽재식 작가, 썬킴처럼 유머도 있고 내용 전달도 잘하는 고정패널들도 있고, 특집처럼 일정 횟수를 나오는 미술 분야 전시해설가, 비비탄을 줍던 밀리터리 덕후에서 국방전문으로 성공한 기자, 포켓몬 카드 대신 세상 모든 곤충을 모으고 싶었다던 곤충 만화를 그리는 작가, 음식이 좋아서 기자에서 요리사로 직업을 바꾼 셰프까지 다양한 분야의 덕후가 나..
온라인 세상의 정체성 인간은 가진 육체적 조건, 능력에 비해 너무 큰 인식체계를 가지고 있다. 요즘 벌어지고 있는 묻지마 폭행과 흉기 난동을 보며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인간이 다른 생물보다 뭐가 더 나아서 지구를 뒤덮고 있지? 저렇게 묻지마 폭행으로 뭐를 말하고 싶은 거지? 말하는 방법으로 어떻게 저런 무차별적인 폭력을... 유발 하라리는 그의 책 ‘호모 사피엔스’에서 인간의 상상력으로 지혜 인간 호모 사피엔스를 규정하고 있다. 다른 동물보다 열악한 신체조건을 가졌지만 상상력으로 지구를 지배하게 되었다고. ‘나 어제 뒷산에서 소보다 큰 호랑이를 봤어.’를 들었을 때 그것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 그래서 위험을 피할 수 있고, 지식을 전달할 수 있고, 마침내 자연을 탐구하고 신도 만들 수 있는 능력인 상상력...
바란다 기대는 믿음에서 나온다. 그가 약속 시간에 맞춰 나올 거라는 기대. 의사가 내 병을 파악하고 적절한 진료를 해줄 것이라는 기대. 4000원을 내면 향긋한 아메리카노를 1잔 받을 거라는 기대. 그리고, 내가 말을 하면 내 뜻을 알아들을 거라는, 나에게 공감해주고 나를 지지해 줄 것이라는 기대. 소통과 변화는 믿음 중 가장 어려운 믿음이다. 그래서 소통하기 전에 한 걸음 물러날 때도 있다. 무슨 일을 할 때 상대가 내 생각과 달라서 실망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내가 그를 믿었구나 자각된다. 그리고 또 한 걸음 물러난다. 하지만 사실 누구나 보살핌을 갈구한다. 나도 그렇다. 공감과 소통을 바란다. 믿음도 파악하는 능력이다. 전투력처럼 보이진 않지만 상대에 따라 자기만의 믿음 수치가 있다. 가끔 정답이 있는 ..
특출남 즐겨보는 TV프로그램 중에 ‘개는 훌륭하다’라는 프로가 있다. 이번에 본 케이스는 정말 아무리 강형욱 훈련사라도 어떻게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 어마어마한 다견 가정이었다. 비숑. 비숑. 비숑. 비숑. 40여 마리 개들이 무리를 지어서 그들의 위계와 조직이 있어... 아무리 강 훈련사님이라도 전부를 주목시키거나 하나 하나를 훈련시킬 수 있는 여력이 될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무려 40여 마리니까. 그런데 역시나 전문가. 그는 해냈다! 먼저 기존 개 무리의 힘의 흐름과 역사를 관찰하고 개체들의 성향을 알아본 후 본인이 파악한 것이 맞는지 보호자와 사실을 확인하는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보호자에게 상황을 설명한 후 강아지들을 성향별로 무리를 나눠서 케이지에 분류했다. 그리고는 거실, 2층 테라스, 마당 등으로..
회복적 생활 공동체 서울 젊은 초등학교 선생님의 안타까움 죽음과 인기 웹툰 작가의 교사 고소. 난데없는 학생인권조례 공격에 오은영박사님 소환까지. 일련의 사태를 바라보는 배타적 시선이 두렵다. 설마 뒤통수 정도는 귀엽다고 툭툭 쉽게 치고, 회초리와 출석부가 기본 세트인 폭력에 무감각한 시대로 돌아가려는 건 아니겠지만, 편 가르고 나쁜 놈을 만들어서 벌하면 일단 권선징악 정의가 실현된 듯 속 시원하겠지만, 그것이 정말 우리 공동체를 위한 옳은 방향인가? (사실 이런 말을 할라치면 ‘너 잘났다.’ 류의, 너희 집에 데리고 가고, 니가 해라 식의 공격이 무섭기도 하다.) 공동체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인권은 결국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간적인 개념이다. 인권은 정해진 양이 있는 재화가 아니므로 당연히 다툼의 영역이 아니..
걷기의 즐거움 이동수단이었던 걷기가 즐거움이 되는 나이이다. 아니 꼭 나이가 이유가 아니다. 나는 급하고 젊고 생생하니까. 으하하하 허리가 아파지고는 건강을 위해 일부러 걷기를 시작했다. 점심을 먹고 일부러 골목길을 걸어 들어가기도 하고, 저녁 산책도 늘렸다. 이동수단, 시간으로서의 걷기에서 걷기를 위한 걷기를 하니 공간 속 이야기가 보인다. 능소화가 흐트러진 저 담장 안 따뜻한 집은 옛날 양반집이었을까? 전 반찬가게에는 짜지 않은 반찬을 보유하고 있을까? 저 카페는 사장님이 건물주일까? 아님 세를 맞추느라 손목이 나가도록 커피 가루를 두드리고 있을까? 내가 특히 좋아하는 걷기 장소는 집 앞 공원이다. 집 앞 공원은 낮은 산과 호수를 끼고 제법 꼬불꼬불 길어서 여러 방향으로 잘 걸으면 왕복 60분도 걸을 수 있을 정도..